<시론>WTO 提訴는 권리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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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한국정부는 미국정부를 상대로 삼성전자의 컬러TV에 반덤핑관세조치를 철회치 않고 있는 것은 불공정행위라며 사상 처음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키로 했다.역사적으로 한국은 유리한 입장일 때도 공식 채널로 통상문제를 제기하기를 꺼려온 만큼 WTO의 조치를 요구하는 이번 결정은 무역상대국에 대한 한국의 대응력을 높여나가는 긍정적인 진전이다.

사실 한국의 이번 제소는 그럴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미국은 지난 84년 한국산 컬러TV에 대해 첫 반덤핑관세를 부과했다.이후 연례 검토에서 삼성은 매년'덤핑을 하지 않았다'는 판정을 6번이나 받았고,지난 91년4월부터는 컬러TV의 직접수출을 중단한 상태다.

삼성은 미 상무부에 반덤핑규제를 철회해줄 것을 거듭 요구했으나 상무부는 절차상의 이유를 들어 번번이 거절해 왔다.현재는 상무부의 철회가 적절한지를 결정하기 위해'상황변화에 따른 재심'이라는 또다른 절차가 진행중이다.

그러나 관세.무역일반협정(GATT)규정에 따르면 특별한 일이 없는한 1년으로 정해진 이 검토기간은 지난 6월24일 이미 만료됐다.그런데도 미국정부는 여전히 딴청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정부는 미국정부의 GATT규정 위반에 대해 강력히 제소할 수 있게 된 셈이다.물론 한국은'GATT규정을 위반한 것은 미국'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논리나 명분면에서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다.과거에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내가 알기로도 한국정부는 미국에 대한 제소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이 문제를 우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다.사실 한국은 자제와 이해심을 과시하면서 상당기간 미국에 대한 WTO제소를 미뤄왔다.

지난날 한국은 가까운 동맹이라는 이유로 공개적 채널을 통해 미국의 무역관행에 항의하는 것을 꺼리는 대신 비공식 협상채널을 택했다.예전에도 한국은 WTO에 제소할만한 근거가 충분했지만 공식적인 항의는 미국에 대한 전쟁선포나 다름없다는 문화적 믿음때문에 이같은 정책을 유지해 왔다.

그런 점에서 이번 결정은 한국 통상정책에서 극적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특히 한.미간의 '감정적인'관계와'사업상' 관계를 한국이 기꺼이 분리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새로운 한국의 자세는 신중할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대미(對美)관계에서 한국을 더 나은 입장에 서게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그동안 두 나라간의 가까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통상문제에 완고한 입장을 보여왔다.이는 슈퍼 301조나 GATT에 의한 제재를 발동하겠다고 위협해 얼마나 시장을 개방하게 했는지,또 한국상품에 대해 얼마나 반덤핑판정을 내렸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상무부가 지난 80년 반덤핑법 실행책임을 맡은 이래 미국은 한국산 수입품에 대해 무려 33건의 규제를 부과했다.게다가 95년이래 미국이 첫번째로 WTO에 제소한 5건중 3건이 한국을 상대로 취해졌다.

한국의 이번 결정은 한국이 더 이상 지난날의 한.미간 통상불균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메시지를 미국에 전한 셈이다.한국은 이제 자신의 권리가 침해될 때 기꺼이 공세적 입장을 취할 것이다.또 동등한 신분이 보장된 다자간기구에서 이같은 권리를 적극 행사하려 할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 마찬가지로 국제통상법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양국관계를 반드시 악화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이번 소송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 제소로 단기적으로는 긴장이 증가할지 모른다.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공식적인 행동을 취하거나 다룰 때는 더 신중해야 한다는 주의를 환기함으로써 한국의 협상지위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그러므로 한국의 이번 WTO제소결정은 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김석한 재미통상전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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