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새 연재소설 박상우 장편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 작가의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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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지금은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이 분리 수거되는 시대.나는 세상 도처에서 빈 페트병처럼 혹은 일회용 인스턴트 식품 용기처럼 가볍게 사용되고 부담없이 버려지는 무수한 사랑을 목도한다.감정적 잔흔(殘痕)까지 말끔하게 처리되는 분리 수거 시대의 사랑은 얼마나 편의적인가.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버려지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의미일 테다.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 사용자들의 마비된 심성에는 자기 정화 시설이 없고,그러므로 거기서 양산되는 감정은 아무리 짙은 립스틱 빛깔을 띠고 있어도 내적인 강렬함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인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그것은 과거에서 잉태되고 현재에서 숙성하고 미래에 이르러 비로소 광채를 얻게 되는 사랑의 공간을 상징하는 말이다.내가 그것을 처음 목격한 것은 어느날 밤,화려한 껍데기들이 넘쳐나는 편의점 쓰레기통 속에서였다.놀랍게도 에메랄드 궁전이 거기,세기말의 쓰레기통 속에서 한없이 추레한 외관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의미를 복원하는 작업을 꿈꾸기 시작했다.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화롭게 연결해야만 비로소 잃었던 광휘를 되찾게 될 에메랄드 궁전,그것이 우리들의 삶에 씨줄과 날줄로 아로새겨진 진정한 사랑의 공간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미래를 통해 과거를 되새기고,과거를 통해 현재를 담금질하는 과정은 얼마나 지난할 것인가. 1997년 7월1일 아침,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서기 2000년 5월1일 아침으로 시간 이동을 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다 에메랄드 궁전 흔적이 남아 있는 1970년대로 다시 시간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요컨대 과거와 미래로 시간이동을 하며 소설을 읽는 현재시점을 부각시키려는 게 나의 의도이거나 전략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무렇든 이 여름,에메랄드 궁전을 복원시키기 위해 나는 또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염두에 둔 고원지대에서 몇 달을 보내며 집중적으로 연재소설을 쓰게 되겠지만,그것이 나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는 마음가짐으로 나는 무더운 여름을 관통해 나갈 것이다.독자 여러분이 한낮의 뙤약볕을 잊게 하는 서늘한 그늘이 되고,지친 심신을 각성시켜 주는 새벽의 냉기가 돼 줄 거라는 믿음.그리하여 독자들보다 먼저 에메랄드 궁전을 향해 떠나지만,거기서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으로 나는 설레는 기다림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사랑의 의미가 복원되는 거기,에메랄드 궁전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박상우

<사진설명>

그대,그대에게도 첫사랑은 있다.자동차 달리는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당신의 마음,그 속 깊이 묻어둔 사랑이 있다.당신이 묻어둔 사랑,그 깊디깊은 사연이 시작된다.금동원 그림'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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