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열광'이 없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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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프랑스 총선 결과가 전해진 지난 3일의 우리 조간신문들에는 좌파연합의 승리를 기뻐하는 좌파지지 파리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일제히 실려 간접적으로나마 파리 분위기를 호흡할 수 있었다.환호하는 남자친구의 뺨을 끌어당겨 키스하고 있는 젊은 여인,사회당의 심벌인 붉은 장미를 입에 문 여성을 중심으로 세명의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장면…. 현실은 정말로 드라마보다도,예술작품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예술적인 것인가.파리시청앞 광장을 지나던 남자가 함께 가던 여인의 어깨를 감싸안고 키스하는 모습을 담은 로베르 드와노의 저 유명한 작품'키스'와 일본에 승리한 것을 기뻐해 길에 나온 간호사를 허리가 꺾이도록 끌어안고 정열적인 입맞춤을 하는 해군수병의 모습을 잡은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의 또 다른'키스'에 못지 않은 감동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그 감동은 사진의 장면이 멋지기 때문만은 아닌 것같다.'변화'라는 현상이 가져다 주는 신선함과 변화에 대한 목마름이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무감동한 것일 수도 있는 사진들에서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렇다.우리 사회는 너무나 변화도 없고 따라서 극적인 감동도 없는 사회다.변화란게 있어도 기껏해야 '컵 속의 폭풍'일 뿐이다.

그것을 최근 신문과 TV가 경쟁적으로 주최하고 있는 대선주자 토론회를 접하면서 새삼 실감한다.등장한 대선주자들은 8~10명이나 되지만 그들이 과연 서로 무엇이 얼마나 다르다는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얼굴을 가리고 음성을 변조한다면 시청자들은 토론자가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신문에서는 이름만 지워버리면 누구의 이야기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공정한 경쟁이 벌어진들 이런 무개성한 후보들간의 경쟁이 얼마나 가치있는 결과를 낳을 것인가.심지어 그동안에는 그나마의 차별성을 보여주던 DJ마저 DJP인가,DJT인가 하는 식의'짬뽕'전략으로 개성이 없어졌으니 정치이념적 차원에서 보면 후보는 사실은 딱 한명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선거가 불과 6개월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대선후보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경쟁의 판이 이렇듯 무개성적.무뇌(無腦)적이기 때문이다. 대선주자간의 경쟁이 마치 미스코리아 뽑는 것처럼 돼버렸으니 누군들 양보하고 싶겠는가.그래서 정치이야기의 테두리만 벗어나도 지극히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못하는 수준이면서도 아무런 주저없이 이 시점까지도 승리를 장담하며 토론에 임하고 있다.

토론회를 지켜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긍정적인 언급이 전혀 없지는 않다.“아무려면 지금보다야 못하겠나.다들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는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우리가 고작 이런데서나 위로를 받아야 하다니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정치가 이렇듯 고여있는 늪처럼 답답하고 졸린 근본적 이유는 우리 정치가 단색(單色)인데 있다.독재대 반독재라는 2분법마저 사라지고 나자 우리 정치는 더욱 더 무색무취(無色無臭)한 것이 돼버렸다.여야 구별은 아직도 있지만 그것은 마치 제비뽑기에 떨어져 하나는 여가 되고,하나는 야가 된 것처럼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보라.최근의 선거결과로 정권이 바뀐 영국이나 프랑스는 물론이고 미국 역시도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색깔에서 차이가 나고 지향점이 다른 정당이 경쟁하며 사회에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고 있지 않은가.서로 색채가 다른 이들 정당들이 정권을 주고 받으며 시계추의 움직임과 같은 변화를 낳으며 사회를 전진시키고 있다.이에 비하면 우리 사회는 시계추가 꼼짝도 않고 정지돼 있는 사회인 것만 같다.또한 사물을 항상 한 쪽 눈으로만 보는 정신적 애꾸사회인 것도 같다.

이래서는 사회의 활기도,변화도 기대하기 어렵고 현실진단은 항상 치우치고 빗나간 것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 정치는 하루 빨리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녀야 한다.그래야 우리는 다양한 대안(代案)들을 지닐 수 있다.

얼싸안는 장면을 고작 대학입시 합격자 발표장에서나 볼 수 있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자신이 지지한 정당의 승리를 기뻐하는 시민을 시청앞 광장에서 만날 수 있는'열광의 정치'에 목이 마르다.

유승삼 중앙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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