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짚기>귀머리에게 고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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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오늘부터 문화칼럼'승효상의 시공짚기'를 신설합니다.한달에 1~2회 선보일 이 칼럼은 중견 건축가 승효상(承孝相.45)씨가 다양한 문화.사회현상을 건축가의 시각으로 잡아 문제를 제기하는 난이 될 것입니다.承씨는 서울대 건축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빈 공과대학에서 수학한 후 고(故)김수근(金壽根)씨가 설립한 공간연구소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대표작품으로는 한국의 전통미와 현대적 미감을 조화시킨 서울논현동'수졸당'등이 있으며 저서로는'빈자의 미학'이 있습니다. 편집자

19세기 말엽 유럽사회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오랫동안 그 사회를 지탱해왔던 귀족문화가 서서히 붕괴되고 대중문화가 새로운 가치를 갖게 되면서 이 두 가치체계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던 시점이었다.이 갈등은 귀족이나 일반시민 모두에게 그들이 지녀왔던 가치관의 전도를 가져왔으며 이는 그 때까지의 시대를 이끈 중심된 의식이 실종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세기말적 징후가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었던 것이다.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평민의 경제적 부(富)는 그들이 동경해오던 귀족적 생활을 가능하게 했으나 그들 신분과 맞지않는 이 생활은 허영일 수밖에 없었다.그들의 의복과 방은 과도한 장식으로 꾸며지고 그들의 건축은 과시적 형태가 주류를 이뤘으며 도시는 건전하지 못한 가십거리로 가득 차 있었다.사회 전반으로 퇴행적 취향이 만연하고 말초적 허무주의에 빠진 예술은 성을 유희의 도구로 삼으며 도덕은 떨어지고 드디어 그들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 위기의 시기였다.

합스부르그 왕조 이래 유럽 문화의 중심도시로 자리잡은 빈 역시 왕조의 퇴조와 더불어 데카당스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새로운 시대의 전개를 직감한 이 도시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이러한 세기말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치열한 예술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분리를 의미하는'세쎄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운동은'그 시대에 그 예술을,그 예술에 그 자유를'이란 경구를 내세우며 관능과 시대착오에 빠진 문화를 구하고자 하였다.그 가운데서도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귀머거리에 고함'이라는 글귀와 함께 본질과 근원을 잊고 부유하는 그 공허한 사회를 향해 질타한다. 모든 건축이 스스로를 과시하기에 급급한 도시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장식은 죄악이며 참다운 건축은 내부로 향한 것이어야 하고 침묵이야말로 이 어지러운 도시에서 가장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이다.실제로 그는 빈의 한가운데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격자의 건축을 세워보임으로써 새롭게 전개되는 시대의 새로운 이념을 세웠다.당대의 지식인이며 예술가인 그의 확신에 찬 신념은 이성에 바탕을 두고 인간 정신의 승리를 향하는 모더니즘을 탄생케 한 중요한 실마리가 됐으며 이 모더니즘은 20세기의 문화창조를 주도해 인류로 하여금 세기말의 위기를 극복하게 한 시대정신이 된다.

이미 한세기전의 일이며 그것도 우리와 뿌리부터 다른 먼 나라들의 이 역사가 요즘 끊임없이 상기되는 까닭이 무엇인가.왜 잘 살아야 되는지를 모른 채 잘 살아보자고 질주해온 우리의 지금,천민자본이 득세해 도시는 이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그러진 모습의 희한한 건축으로 어지럽고 그곳의 문화는 퇴폐와 저질이며 사회는 온통 무너져 내리는 부정과 부패의 가십으로 가득찬 모습이 그들의 그 때와 너무도 흡사하다.가장 빨리 지었다고 자랑한 다리가 끊어지고 넘치는 소비의 상징이던 백화점이 무너져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것이 단순한 기술적 붕괴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논리의 붕괴며 물질에만 탐닉해온 편향된 가치의 추락이다.그래서 우리는 바야흐로 세기말의 위기에 직면해 있지 않을까.그렇다면 우리의 이 미궁의 시대를 궤뚫을 새로운 시대정신을 우리는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우리의 정치와 경제에서는 해답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그 해답의 지혜를 가진 이 땅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이제 말할 때가 됐다. <글 승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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