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리뷰>한석봉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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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한석봉(韓石峯)은 깜깜한 밤중에 떡써는 어머니와 마주앉아 글씨를 쓴 적이 없다.한석봉에 대해 조선시대 정사를 뒤적이면 적어도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훈도가 아들의 교육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또 누구든 스스로의 노력여하에 따라 대성(大成)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귀감이라면 다소 아리송하더라도 명필의 대명사인 석봉에게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일화는 아닐 것이다.석봉이 어머니 옆에서 글을 썼건 안썼건 그는 분명히 조선시대의 초특급 명필이다.

공식적으로는 조선중기 정부의 공식문서 기록관이었고 글씨가 하도 뛰어나 왕명으로 습자교과서인 천자문을 썼던 서예가였다.

하지만 그토록 뛰어난 서예가이면서 동시에 도연명(陶淵明)이나 이백(李白)을 좋아한 시인이었다는 사실.또 성격은 과묵하면서 신중했으나 때로 술을 즐겼고 활도 능숙했던 그의 면모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그런 점에서는 다분히 불운한 예술가인 석봉의 세계를 최초로 소개하는 전시가 열린다.예술의전당 서예관이 5일부터 22일까지 개최하는'석봉 한호(石峯 韓濩)전'이다.

기획이 시작된 것은 3년전.서예관은 그간 서예사 연구와 짝을 이룰만한 한국서예사의 흐름을 재정리하는 전시를 기획해 왔다.그러나 석봉전은 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전시였다.연구가 뒤를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완우(李完雨)씨가 한석봉에 대한 연구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이 기획이 실현됐다.

알려지지 않은 그의 전기(傳記)를 상당부분 복원한 李씨의 연구에 힘입어 이번 전시는'빈한한 가정에 태어나 자신의 노력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른 걸출한 서예예술가' 석봉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개작은 전기자료를 비롯해 유명한 석봉천자문,조선시대 습자 교과서가 된 여러권의 석봉필첩,시에 능통했던 석봉의 자작시,해서보다 초서에 능했던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초서천자문,그리고 왕실에서 글씨를 연습했던 대자(大字)글씨등 1백여점이다.

석봉은 2천년 한국서예사를 통틀어 5대 명필중 한사람이다.신라의 김생,고려의 승려 탄연,조선초 안평대군 이용,그리고 후기의 추사 김정희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위대한 서예가다.

석봉이 석봉다운 점은 4명의 천재와는 달리 근거없는 일화까지 생길 정도로 오로지 자신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 명필이 된데 있다.석봉 친구의 동생인 허균은 석봉의 제문(祭文)을 쓰면서“연못물이 먹물이 다 되도록 글씨를 배웠다”는 귀절을 넣어 그의 노력이 엄청났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석봉의 글씨는 해서든 행.초서든 왕희지체에 기본을 둔다.그러나 왕체의 유려함 위에 한국적 맛인 강인한 골격과 힘찬 필치를 갖춘게 특징이다.그래서 중국 학자인 왕세정(王世貞)이 그의 글씨를 보고 놀라면서“성난 사자가 돌을 할퀴는 듯하다”고 했다.

석봉체는 후대에 교습용 천자문이 유포되면서 근세까지 단정한 글씨의 모범이 됐다.임진왜란이후 정부의 공식문서나 일반의 비문들이 그의 글씨체 일색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석봉 하면 해서를 떠올리지만 예술가 석봉의 진정한 모습은 행서와 초서에 있다.특히 초서는 왕체를 넘어 당나라 회소(懷素)나 장욱(張旭)에 가까울 정도로 웅장하면서 질박한 맛이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초서글씨는 활달하면서 거침없는 석봉의 초서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이 전시에도 아쉬운 대목이 있다.문체부가 6월의 문화인물로 석봉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9월로 예정된 전시를 6월로 끌어냈기 때문이다.따라서 기획된 것중 80%정도만 보여주는데 그치게 됐다.그렇지만 석봉연구는 이를 계기로 새롭게 시작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사진설명>

선조의 명에 따라 쓴 석봉의 해서 천자문.왕희지의 유려함에 힘찬 필세가 특징이다(1694년 重刊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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