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신부님 패트릭 맥그린치 제주도 사랑 44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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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리에게 제주도는 이국적이다.외국인에게는 더할 것이다.'관광제주'의 기치가 등장한 것은 그런 분위기를 살리자는 취지다.하지만 정작 그곳에서 삶을 꾸리고 있는 사람에게 관광산업화는 남의 얘기가 돼 있다.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69)신부.그의 꿈은 현지 농축산민을 '관광제주'의 실현주체로 만드는 일이다.자신의 목장을 청소년 교육의 장으로 삼아 농촌생활을 체험토록 유도하고 있다.아일랜드 출신의 한 외국인이 이런 열정을 쏟는 이유는 무얼까. 54년 4월 어느날,그는 제주도에서 고국의 해변정경을 보았다.한국에 부임한지 꼭 1년만이었다.소록도와 벌교등지를 다니며 선교활동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잠시 머물렀다 떠날 고난의 땅이었건만…. 그때 제주도는 4.3이 할퀴고 간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아픔의 섬이었다.하지만 26세의 신부는 10시간의 항해끝에 도착한 제주에서 삶의 이정표를 돌려 세웠다.“돌담사이로 고향에서 본듯한 바닷바람이 불고 있더군요.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는 모습도 아일랜드와 비슷했습니다.밤새도록 왁자지껄한 장례식 풍경도 오랜만에 보았지요.” 그는 돌투성이였던 중산간마을 개간을 시작했다.4H클럽을 결성해 청년들과 함께 양을 기르면서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동분서주하길 6년.그는 안식년을 기해 아일랜드로 돌아갔지만 제주도만을 떠올렸다.“그래,모금운동을 펴 재원을 마련하자.”1년만에 다시 제주로 돌아와 돼지.닭등을 기르는축산업을 시작했다.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시돌(신의 가호를 받은 스페인 농부이름)목장을 만들었고,병원.양로원을 지었다.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67년 5.16민족상,72년 대한민국 석탑훈장,75년 막사이사이상등은 그의 정성을 기억하는 기록장이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맥그린치 신부는 활력을 많이 잃었다.비단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소값 폭락등 시장개방 충격을 지켜보는 게 괴롭습니다.어떻게 이뤄놓은 것들인데….아일랜드도 비슷한 위기가 있었죠.하지만 정부지원책으로 고비를 넘겼습니다.”지금은 고령인 맥그린치 신부의'제주사랑'엔 쉼이 없다. 제주=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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