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조>컴퓨터는 기계일뿐 - 워싱턴포스트 13일자 리처드 코언 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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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IBM의 슈퍼컴퓨터'딥 블루'가 체스의 명수 게리 카스파로프를 꺾자 이젠 기계가 인간 이상으로 지성을 지니게 됐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진실과 동떨어진 주장도 없다.불과 19수만에 이뤄진 카스파로프의 패배는 웬만큼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입증했다.

똑똑하지 않더라도 체스는 잘 둘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카스파로프는 다른 위대한 체스 선수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이'컴퓨터'였다.딥 블루보다 다재다능했으나 이 2백만달러짜리 슈퍼컴퓨터보다 체스를 더 잘두지 못했을 뿐이다.

체스 애호가들이라면 이 컴퓨터가 대부분의 체스 고수(高手)들과 아주 비슷한 면모를 갖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체스를 아주 잘두거나 체스와 관련된 사안은 잘알고 있을지언정 무척 미련하기 십상이다.

체스처럼 어린아이들도 잘해낼 수 있는 일들은 인간본연의 창조적 재능없이도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분야에서는 하찮은 기계도 굉장한 성과를 낼 수 있다.

음악은 창조적인 것이지만 어린아이들도 잘해낼 수 있다.

모차르트.멘델스존이 어릴적 주옥같은 작품을 작곡해 낸 것은 사실이다.그렇지만 이들의 후기 작품이 초기보다 훨씬 감동의 폭이 깊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글쓰기에 관한한 어린아이들이 걸작을 창조해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12세 정도의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들려줄만한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먼 훗날 딥 블루처럼 3분에 5백억번 이상의 연산을 해내는 슈퍼컴퓨터가 놀라운 시와 책을 써낼 가능성도 이론상 존재할 수는 있다.그러나 이같은 일은 실현되지 않을게 거의 확실하다.

창작의 근원인 언어 자체가 무한히 탄력적이기 때문이다.체스의 말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충분히 계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너무도 많은 의미를 함축한'사랑'이란 단어를 정확히 사용한다는 것은 도저히 컴퓨터의 연산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언어를 완전히 이해해야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풍부해야 한다.

과거 한번도 존재치 않던 방법으로 두개의 단어를 훌륭히 연결하는 것이 바로 창조력이며 이는 도저히 계산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여기다 삶을 살 수 없는 컴퓨터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기계는 행복.사랑.슬픔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으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컴퓨터는 체스의 말을 어떻게 움직일지는 정확히 계산해 내지만 체스경기를 해야할지,말아야 할지를 판단치는 못하는 것이다. 정리=남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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