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95> 金三角과 국민당 패잔부대<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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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경내에 머무르던 부흥부대의 소년병들. 김명호 제공

1949년 봄부터 국공(國共) 양군은 전력의 우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승세를 잡은 중국인민해방군은 전군을 4개의 야전군으로 재편해 국민정부군에 총공세를 퍼부었다. 11월을 전후해 류보청(劉伯承)과 덩샤오핑(鄧小平)이 지휘하는 제2야전군은 구이저우·광시·쓰촨을 장악한 뒤 윈난(雲南)을 3면에서 포위했다.

투항을 결심한 국민당 윈난성 주석 겸 보안사령관 루한(盧漢)은 12월 9일 밤 쿤밍(昆明)에서 긴급 군정연석회의를 개최해 지휘관들을 설득했다. 일부는 응했지만 8군단장 리미(李彌)는 불복했다. 루한은 리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상관의 뜻을 파악한 8군 예하 709부대장 리궈후이(李國輝)는 6만의 병력을 동원해 쿤밍을 공격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상하이 지하당 특공요원 출신 천껑이 지휘하는 부대가 몽고를 경유해 쿤밍을 향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헛소문이라 할지라도 천껑이라는 이름은 공포를 상징했다. 후퇴를 결정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위안장(元江) 일대에 도달했을 때 해방군 2개 사단에 기습을 당해 거의 전멸했다. 대륙에서의 마지막 전투였다.

리궈후이는 잔여 병력 2000여 명과 그들의 가족을 이끌고 국경선을 넘어 버마(지금의 미얀마) 경내로 진입했다. 태국을 경유해 하이난다오(海南島)로 철수할 계획이었다. 국경을 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행군은 독사와 맹수와의 싸움이었다. 전갈이 우글거리는 소택지를 앞선 사람들의 시체를 밟고 통과했다. 원주민들도 이들을 적대시했다. 마을 통과와 식량 요청을 거절했다. 무기라고는 창과 활이 다였지만 최후의 일인까지 저항했다. 몰살을 시킨 후에야 행군을 계속하고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샤오멍펑(小孟捧)이라는 산골 마을에 도달했을 때 또 다른 국민당 패잔부대를 만났다. 군관회의에서 합병에 합의했다. 가족을 제외한 무장군인 1600명을 근간으로 ‘중화민국 부흥부대 총지휘부’를 신설했다. 타이완과의 통신이 재개되자 경과를 보고하고 후속지시를 요청했다.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라”는 장제스 명의의 전문이 왔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병력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들은 버림받은 군대로 전락했지만 국민당 군모를 벗지 않았고 연병장에 게양된 청천백일기를 내리지 않았다. 달 밝은 밤이면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방에서 노래와 흐느끼는 소리가 뒤범벅이 되곤 했다. 차라리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보낸 아침은 생기가 돌았다. 150여 년 전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다량의 양귀비(罌粟)를 재배했다. 아편을 제조해 중국·월남 등 동남아국가에 수출하자 금삼각(金三角)이라 불리던 버마와 태국의 북부 지역에서도 양귀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경영은 산간지역의 족장이나 추장들의 몫이었다. 대상(隊商)을 고용해 아편을 외부로 운반했다.

아편을 판 돈으로 식량과 생활용품을 구입해 의식주를 해결하고 이윤을 취했지만 운송 과정에서 무장한 소수민족이나 토비(土匪)들에게 털리기 일쑤였다. 토비들의 무장은 반수 이상이 도끼와 창이었다. 용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무기였다. 대상들은 부흥부대의 무장에 매력을 느꼈다. 비록 패잔병들이었지만 최신 무기를 소유한 정규군이었다. 토비나 비적들은 이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부흥부대는 아편 운송을 독점했다.

환경에 익숙해지자 저녁노을보다 더 붉은 양귀비가 이들을 유혹했다. 독을 감싸고 있는 아름다움도 그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었다. 사지에 들어가야 살 길이 나온다는 고대 병법의 가르침은 만고의 진리였다. 아편을 이용해 군대를 양성(以毒養兵)해서라도 고향에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이 외로운 부대 안에 감돌기 시작했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도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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