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바이츠제커 前독일대통령 특별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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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전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체코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과 함께'세계의 3대 양심'으로 불린다.94년까지 10년동안 대통령을 지낸 그는 재임중 독일 통일을 맞아'통일 대통령'의 영예를 누렸다.그는 변호사.교수.종교단체 지도자.정치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면서 자주'도덕적인 용기'를 실천해 독일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됐다.말(연설)이 정치의 중요수단인 유럽에서 그는 명연설가로 알려졌다.90년 10월의 통일연설과 95년 종전(終戰)50주년 기념연설은 널리 인용되고 있다.회고록 집필에 열중하고 있는 그를 베를린 시내 페르가몬박물관 앞에 있는 사무실로 방문해 60분동안 긴 안목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제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대가 소련의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던 44년으로 되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그때 각하는

연대부관이었습니다.연대장이 외출중이던 어느 날 상류사회 출신 젊은 장교

6명이 모여 히틀러의 만행을 규탄하는 토론을 벌이다가 흥분을 참지 못한

장교 한사람이 권총을 빼들고 벽에 걸린 히틀러의 초상을 쏘았습니다.다른

5명의 장교들이 사태의 심각함에 경악해 할 말을 잊고 있을 때 한 장교가

나서서 모두 히틀러를 쏘자고 제의하고 이미 흉한 몰골이 된 히틀러의 사진에

권총을 발사했습니다.다른 장교들도 따라 했습니다.그들은 모두 공범이 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건은 탄로나지 않았습니다.함께 쏘자고 나선 장교는

바로 바이츠제커 중위였습니다.그때 어떤 심정으로 목숨을 건 모험을

주도했습니까. 바이츠제커=그때 우리는 상부로부터 매일 무책임하고

터무니없는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우리는 항상 그런 명령을 아래로

전달해야 하는가,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번민했습니다.그런

분위기에서 토론하다가 성격이 급한 장교가 히틀러에게 권총을 쏘았던

겁니다.

김=그 사건이 그 뒤 각하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습니까.

바이츠제커=아닙니다.잊어버리고 살았어요.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언론인

마리온 된호프에게 그때의 일을 얘기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어요. 김=각하는

대통령재직때 대통령관저에서 빌리 브란트 전총리의 75회 생일파티를

열었습니다.여당 소속의 국가원수가 야당 출신의 전총리를 위해 관저에서

생일잔치를 베푸는 것이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이츠제커=독일과 유럽에서도 드문

일입니다.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페인에서도 그런 전례가 없는 걸로

압니다.나는 브란트의 업적을 개인적으로 존경해요.그가 총리였을 때 나는

야당인 기민당의 동방정책 대변자였어요.그러면서도 나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합리적이고 책임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기민당의 정책에

반대했어요.브란트는 과거에 공산당원이었던 전력(前歷)때문에 국내에서

공격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브란트에게 공개적으로 경의를 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그 생일잔치가 서독의 정치에 다소의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그때 각하는 권력과 도덕의 긴장관계를 얘기했습니다.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지금 권력과 도덕의 균형이 무너져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구미(歐美)에서는 도덕과 권력이 균형을 잡고 있는 반면

동양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권력이 우위를 누리고 있는데서 많은 문제가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이츠제커=독일과 그 이웃나라의 경우로

한정해 대답하겠습니다.도덕과 권력은 긴장관계에 있습니다.그것이 유럽형

민주주의의 장점입니다.우리는 항상 이 긴장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논의합니다.한쪽이 너무 강해져 다른쪽을 누르면 우리는 균형을 잡는 조치를

취합니다.도덕이 없는 권력으로는 책임정치를 실현할 수 없고 권력없는

도덕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김=권력형 부패가 위험수위에 이른

나라에서는 정치와 정치인들의 도덕성에 대한 요구가 현실적이 아닐 정도로

강할 수가 있습니다.정치에 있어 적정수준의 도덕성 같은게 있습니까.

바이츠제커=물론 도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인간을 그의

본성(本性)이상으로 개선하자고 민주주의를 하는건 아닙니다.민주주의는

결점을 가진 인간을 있는 그대로 대합니다.정치인들은 그들이 믿는 도덕성이

어떤 것이고,정치활동에서 어느 수준의 도덕성을 발휘할 수 있고 발휘할

준비가 돼있는지 분명히 해야 해요.그 이상은 기대할 수 없지만 그 정도로도

이미 높은 기대라고 할 수 있어요.도덕으로 국가를 통치하려고 하면 그건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립니다.그건 위험해요. 김=한 나라,한 사회가

집단적으로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일 수도 있습니까. 바이츠제커=집단적인

도덕성과 비도덕성을 믿지 않아요.물론 어떤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전통에

따라 특정한 행동이 용납되고 같은 행동이 다른 사회에서는 부도덕한 것으로

취급되는 일은 있어요.그러나 전통과 관계없이 기본적인 선악의 구별은

가능합니다.우리의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에서 찰스 다윈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리에 따른 경쟁의 룰만을 따를 수는 없어요.경쟁원리

외에 문명은 일정 수준의 품위(Decency)를 요구합니다.그것도 너무 강조하면

이데올로기로 타락해요. 김=독일은 90년 통일된 후 동.서독의

경제.사회.문화.심리적인 통합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그동안의 통합

실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바이츠제커=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가

경제와 통화의 통합이었어요.90년 여름 화폐가 통합된 후 동독사람들은

갑자기 평생 처음으로 경화(硬貨)를 갖게 되고 이탈리아와 심지어

카리브해안으로 휴가여행을 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그런게 사정을 어렵게

만들었어요.동독지역에서 경화로 봉급을 주려면 그들이 생산한 상품을

수출해야 하는데 동유럽의 국가들은 경화를 갖고 있지 않았어요.그래서

동독지역 경제는 파탄을 맞은 겁니다.서독의 마르크권에 편입한 동독과는

달리 경화를 가지지 않은 폴란드.체코.헝가리같은 나라는 그들의 화폐가치와

임금과 사회보장제도를 균형있게 키워갔습니다.비용이 적게 드니

한국.미국.일본같은 나라가 투자를 많이 할 수가 있었습니다.

심리적인 통합도 쉽지가 않아요.동독지역 사람들은 매일같이 시장경제와

관련된 새로운 법률.관행.규정과 마주쳐야 하고 거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합니다.동독 비밀경찰(슈타지)은 가족간.친구간의 인간관계를

파괴했어요.그래서 과거청산문제도 어려운 과제입니다.화해를 모색하지

않고 진실만 밝히려는 것도 큰 부담입니다.통합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김=동독시절의 간부들을 처벌하는 과제와 동.서독간의 화해를 실현하는

과제가 상충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한국인들의 관심거리이기도

합니다.

바이츠제커=체코의 알렉산드르 두브체크는 68년 프라하의 봄을 주도한

사람이죠.그는 용기와 인격을 갖춘 그 나라 최초의 개혁자였어요.그런데

체코는 91년 두브체크같이 과거에 공산당원이었던 사람들을 공직에서

영원히 추방할 수 있는 법률제정을 검토했어요.러시아에서는 옐친이

소련공산당의 정치국원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없어요.과거에 대한

진실을 밝혀 정의를 실현하되 화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진실은

비인간적입니다.

김=과거를 청산하는데 독일과 일본은 대조적입니다.독일은 나치의

잔학행위로 피해를 본 국가와 민족.개인에게 사죄하고 보상을

했습니다.그러나 일본은 과거에 대해 이웃 피해국가들에 사과하기를

거절하고 히로시마 원폭을 들어 2차대전의 피해자라고 강변합니다.

바이츠제커=내가 대답하기 다소 어려운 질문입니다.내가 보기에는 일본도

점점 개방적으로 돼갑니다.나는 95년 일본에 갔는데 일본의 태도도 바뀐다고

느꼈습니다.일본 사람들은 독일이 어떻게 과거를 청산했고,그 결과는

어떤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예컨대 히로시마 시장은 전쟁과

잔악행위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시작된게 아니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습니다.그건 과거문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해요.나라마다 해결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김=공산주의 붕괴로 민족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 같습니다.21세기에

민족주의가 기세를 올릴 것 같습니까. 바이츠제커=민족이 위험한 민족주의로

전락한 것은 19세기말입니다.1차대전을 통해 유럽 사람들은 민족주의가

자기파괴적이라는걸 깨달았습니다.그러나 민족국가를 초월한 통합의 운동이

시작된 것은 2차대전이라는 엄청난 수업료를 치르고 난 뒤였습니다.지금은

서서히 유럽이 국가이성(제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의

기본준칙)이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고 있어요.국가이성을 민족국가

차원에서 정의(定義)할 수 없게 돼갑니다.독일은 통일된 후 놀라울 정도로

민족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어요.21세기에 민족주의의 부활을 걱정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봅니다.

김=민족국가는 20세기에 많은 재앙을 가져왔습니다.세계화시대에 민족은

부정(否定)하고 극복하고 포기해야 하는 겁니까. 바이츠제커=민족은 극복할

수 없어요.세계화된 세계라고 해서 국가(Nation)의 역할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지금 유럽은 국가가 행사하던 기능을 초국가적인 조직에

위임하려고 하는데 부분적으로라도 주권의 포기를 환영할 국민이

없습니다.그들은 따뜻하고 아늑한 고향에 내린 뿌리를 뽑으려 하지

않아요.그러나 유럽같은 작은 대륙에서는 경제.기술.환경.안보등의 문제를

각각의 국가 단독으로 해결하기는 어렵게 됐어요.위성방송과 자본은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듭니다.초국가적인 공통의 경제와 안보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도 민족이 갖는 문화.정서적 가치는 지켜야 해요. 김=존경받는

대통령.총리.정치가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이츠제커=역사에 대한 감각과

흥미를 가져야 합니다.과거에 대한 지식과 책임감이 중요해요. 김=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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