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속의문화유산>11.고구려 벽화 기운 넘치는 생활상 가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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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역사와 함께 문화는 꽃 피고,그 꽃은 문화유산이라는 열매를 맺는다.까마득히 오래전부터 우리네 선인(先人)들과 함께 이어져 내려온 유.무형의 문화재 속에는 시공을 초월한 문화의 방향(芳香)이 은은히 배어 나온다.

근래에 가장 안타까운 일중 하나는 장천(長川)1,2호 고분 고구려 벽화의 도난 사실이다.언제부터인가 그러한 얘기가 풍문으로 떠돌아다니기는 했지만 내심 아니기를 바라면서 애써 생각 자체를 지우려고 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가슴이 철렁했다.마음 속에 모시던 살아있는 혼이었고 실체였다.반만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주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만든 구체적 모습이었다.

나는 그 살아 있는 그림에서 우리 몸짓의 근원을 보았다.바로 이 시대 몸짓의 지향을 가리키는 현현(顯現)이었다.나약해지고 비틀거리는 현시대인의 늠름한 길잡이였고 역동적 생명을 부어주는 이 시대의 춤이었다.

사실 오래전 고구려를 처음 접하고는 흥분이 일고 가슴이 뛰었다.잃어버렸던 우리 자신이었다.살 맛이 나고 신이 났다.고구려는 분명 살아 있는 것이다.그러한 고구려의 산천과 하늘나라,연꽃으로 뒤덮여진 장천의 풍경은 고구려 혼이 넘나드는 텃밭이었고 고구려 삶의 함축적 상징이었다.거기에는 행복과 기쁨이 화려하게 넘치고 있다.삼라만상과 여러 계층 인간상의 어우러짐,그 시대 민중의 희로애락과 삶의 현장들. 홀로 떨어져 꿋꿋하게 인고의 세월을 참아낸 그 앞에서 아! 나는 너무나 미미한 존재다.

어쩔 수도 없는 얼마나 못난 당신의 후손인가.살점을 에인,아니 통째로 에어진 당신의 살결.피흘리는 상처를 그대로 방치한채 한탄만 하고 있다니.열이 난다.불이 난다.나를 가다듬는다.예의 몸짓으로 내가 당신 앞에 설 때까지. 고구려적 말달리던 광활한 집안벌,바람이는 진파리 언덕의 스산한 산조가락.절대로 홀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아! 가슴저미는 고구려,고구려는 단지 민족의 자부심이 아니다.근원적인 중심이며 분출구다.빛바랜 우리를 재생시키고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화신이다.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고구려 무덤의 수많은 벽그림들은 항상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고구려의 혼이었다.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그 그림들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다.그리고 지금도 무주허공을 떠돌고 있을 장천 1백여분의 혼령들에게 다시 한번 위로와 예를 드린다.

다음에 내세울 형상들은 그 분들의 민중적인 삶이 뒷받침돼 갖가지 장엄한 세계를 펼치고 있다.

이 빛나는 문화재 중에서도 내 마음 속에 새기기로 첫번째는 통구 다섯 무덤의 4호 무덤안에 있는 '해신.달신'이다.영원한 빛을 발하며 천지음양으로 만나는 생명의 탄생이다.상상력을 초월한,가위 귀신의 표현이라 할 만한 예술적 창조다. 그 다음은 고구려의 수문장인 '역사(力士)의 춤'으로 세간 무덤,장천 1호 무덤안의'장사의 몸짓'이다.

땅에 뿌리박고 두 팔 올려 하늘을 떠받치는 든든한 버팀목,다름아닌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가장 근본이 되는 우리의 기본 몸짓이다.

마지막으로 춤무덤(舞踊塚)의 '춤추는 사람들'이다.

이는 고구려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양팔 쳐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진중한 발걸음의 춤이다.내보일 것만 내보이는 단아한 기품이다.너무나 담백해 심심해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그 안에 서려있는 기운은 심상치 않다.이 화려하고 복합적인 가무 한판은 낙천적인 고구려의 감성과 건강한 생명력인 고구려 본성의 상징이다.

해님과 달님이 서로 춤춘다

해님과 달님이 서로 춤추며 다가온다.

머리에 해와 달을 이고 각각 걸음을 옮긴다.

공평하고 균등하게 발걸음 옮기신다.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내가 그 주인공이고 싶다.

두 분이 위치한 공간의 설정 해와 달의 인간화 영겁의 세월 모두를 받아들이는 승화된 함축적 빚음 바로 위 하늘나라 비천 선녀가 생황 불고 거문고 수공후 타고 장구 치고 춤춘다.

비천에서 강림하여 지천을 넘나드는 무등의 춤이다.

어둠을 가르며 세상을 밝히는 해와 달의 춤 후천 시대의 예견이며 바로 현존이기도 하다.

장사의 몸짓은 활력 버팀목

우직하게 한눈 팔지 않고 충정스럽게 서있다.

무릎 지그시 굽히고 두 팔 벌려 하늘을 떠받들듯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땅에 뿌리박고 하늘까지 이어지는 두 팔의 신성한 노동 자기가 있어야 할 곳,해야 할 일을 너무도 알아서 하는 어쩌면 그렇게 자기 본분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을까. 너무나 진지한 장인의 몸짓이다.

인간으로,신인으로,석조기둥으로 마침내 돌이 인간화되고 불끈 하늘을 우러르는 기운 넘치는 춤사위가 펼쳐진다.

천의 자락마저도 기운을 내뿜는 온몸춤이다.

고구려인들의 멋진가무 한판

너울 너울 춤추는 파사무(波娑舞)인가. 줄지어 나는 기러기떼인가. 양 팔을 가지런히 옆으론가 뒤론가 들었는데 눈에 뵌 그대로인 투시법인지,4차원의 공간구도인지 중후한 맛이기도 하고 안정감 있고,어찌했든 도도하기 그지없고 자연스럽다.

매우 정적이지만 살아있는 춤기운은 야외무악의 현장성을 그득히 담아낸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적당히 절제된 중도의 몸짓이다.

주인어른과 개와 동자가 한 곳으로 시선 집중이다.

그 비껴 위에 또 한 사람. 주역의 춤꾼같기도 하고 춤사범같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시간 같은 공간의 이분법적 구도인가 그리고 춤에 가락을 넣기도 하고 독자적 노래패이기도 한 악단. 아! 고구려인들의 멋진 가무 한판.

이애주 <서울대교수.무용>

<사진설명>

춤추는 사람들

춤무덤,즉 무용총의'춤추는 사람들'.고구려벽화 하면 이 장면을 떠올릴 만큼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고구려 사람들의 낙천적인 감성과 건강한 생명력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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