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은 막되 부실책임 추궁 - 채권은행들.금융당국의 진로 선택적 구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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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진로그룹에 대한 채권은행들과 금융당국의 처리방침을 종합하면 한마디로'특혜지원'과 이에 상응하는'책임추궁'이다.

경제에 주름살을 지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진로의 도산은 일단 막아주되 진로의 경영자에게는 기업이 부실화된데 대한 책임을 분명히 묻겠다는 것이다.

이번 방침은 새로 만든 금융기관협약을 진로측에 처음 적용하면서 그 운영방향에 대한 가닥을 잡았다는 의미도 있다.

사실 금융기관협약은 한보.삼미로 이어지는'부도 도미노'현상을 어떻게든 막아보자는 정부의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은행들은 이 협약에 따라 진로의 부도를 막으려고 결제시스템까지 손질했다.그덕에 진로는 22일 실제로 부도가 났는데도 당좌거래를 계속하고 있다. 정부는 쓰러질 기업은 쓰러져야 한다는 경제논리를 외면한 셈이다.기업들에는 불황카르텔을 좀처럼 인정해주지 않으면서 은행들에는'부도카르텔'을 종용했다.

은행들은 정부의 뜻에 따라 불과 1주일만에 금융기관협약을 만들면서도 제2금융권의 반발과 대기업에 대한 특혜라는 비판에 적잖은 부담을 느껴왔다.

또 남의 돈으로 사업하다 잘못돼도 망할 염려가 없다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기업들의'도덕적 해이'를 정부와 은행이 나서서 조장한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런 비판에 따라 금융당국이 보완책으로 강구한 것이'선택적 정리'방식이다.

금융당국과 채권은행들은 이런 처리방식이 기업측으로부터 확실한 자구노력을 보장받고 경영책임을 따질 수 있는 수단으로 보고 있다.

또 특혜지원에 상응해 기업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논리에도 맞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방침은 은행들에도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부실기업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시험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진로의 주거래은행인 상업은행 고위관계자는 이와 관련,▶정상화대상으로 선정한 6개사를 모두 살려주는 것은 아니며▶장진호(張震浩)회장의 경영책임을 묻고 그가 약속한 자구노력의 이행을 보장하기 위해 경영권 포기각서.주식처분 위임각서등을 받아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관계자는 또“28일 채권금융기관 대표자회의가 구성되면 ㈜진로등 6개 계열사들을 대상으로 회생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하나하나 가려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장기간 적자가 쌓여 자본금까지 모두 까먹은 진로건설(자본잠식 8백23억원)과 진로쿠어스맥주(자본잠식 6백27억원),부채비율이 1천7백%에 달하는 진로종합유통등은“회생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채권금융기관 협의회에서 이같은 결론을 내릴 경우 미리 받아둔 경영권포기각서등을 활용,3자인수나 법정관리등의 절차에 들어갈 것이라는 얘기다.

다른 채권은행들도 ㈜진로와 진로종합식품등 재무구조가 비교적 좋고 사업전망도 있는 기업들은 진로측이 약속한 자구노력만 성실히 이행하면 공동으로 자금지원을 계속하면서 경영권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진로에 대한 이같은 처리방식은 앞으로 채권금융기관 협의회의 운영에 중요한 선례로 남을 게 틀림없다. 〈손병수 기자〉

<사진설명>

채권금융기관들이 진로그룹 계열사들중 일부만 장진호 회장에게 경영권을

남겨주기로 함에 따라 진로는 재계서열 19위의 위상이 크게 축소될

전망이다.서울서초동 진로그룹 사옥 전경. 〈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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