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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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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필리버스터(filibuster)란 국회에서 소수파 의원들이 다수파의 독주를 막거나 기타 필요에 따라 합법적인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의사 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어원은 ‘해적’이란 뜻의 네덜란드어다.

대표적인 방법은 장시간에 걸쳐 연설을 하는 것으로, 그 원조는 미국이다. 1841년 민주당 상원의원들이 은행법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차례로 장광설을 펼친 것이 시초로 꼽힌다.

필리버스터링의 난점은 화장실 문제다. 연단을 떠나면 발언권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1957년 24시간18분 동안 마이크를 잡은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의 경우를 보자. 그는 미리 사우나에 가서 몸 안의 수분을 최대한 배출하고 왔다. 발언 중엔 비서가 양동이를 들고 ‘긴급사태’에 대비했다. 그가 반대한 민권법은 결국 통과됐지만 최장시간 연설 기록을 남겼다.

요즘은 실제로 마이크를 잡을 필요가 없다. 그냥 “필리버스터를 하겠다”고 통보하면 된다.

다만 상원의 다수당 대표가 “실제로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엔 실행이 필요하지만.

필리버스터를 막는 방법이 있다. 1917년 상원 재적의원 3분의 2가 찬성하면 토론을 종결하는 규칙이 도입됐다. 이 조건은 75년 재적 5분의 3, 즉 60석으로 완화됐다.

지난 11일 미국 자동차 산업에 14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법안이 좌초된 것은 이 벽을 넘지 못했기 대문이다. 이날 상원은 필리버스터 불허 표결을 실시했으나 찬성 52 대 반대 45로 부결되고 말았다.

필리버스터는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의회정치가 발달한 국가에서 널리 활용되는 제도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저서 『담대한 희망』에서 필리버스터를 “다수의 횡포 위험을 차단하는 방화벽 구실을 한다”고 평가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국회 본회의장 점거가 오늘로 13일째를 맞았다. 의사 진행을 불법적으로 원천 봉쇄한 것이니 소수당의 횡포다. 차라리 선진국의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하면 어떨까. 현행 국회법은 의원들의 발언시간을 엄격히 제한해 이것이 불가능하다. 야당도 여기에 반대할 필요는 없다. 한나라당의 현재 의석 수는 172석으로, 전체 의석의 5분의 3에는 못 미친다. 토론 종결 표결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무제한의 발언 시간을 주면 토론이라도 제대로 하지 않겠는가. 국제 망신도 피할 수 있고. 

조현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