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74년 전 '고령鐵' 다시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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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에 제작된 스프라그-톰슨 열차가 지난달 31일 파리 지하철 10호선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지난달 31일 파리 오스테를리츠역의 10호선 지하철 플랫폼. 박물관 구석에서 조용히 쉬는 게 더 어울릴 법한 구식 열차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1930년에 제작돼 오스테를리츠와 포르트 도퇴이 사이의 10호선을 운행하던 스프라그-톰슨호 열차다. 퇴역한 지 근 반세기 만에 창고에서 다시 돌아왔다. 전기로 움직이는 이 열차는 이날 74년 전 모습 그대로 예전의 10호선 구간을 일곱차례 운행했다. 10호선은 현재 포르트 도퇴이에서 두 정거장을 더 가는 불로뉴까지 연장됐지만 이날 열차는 추억을 회상하는 의미에서 과거 노선만 달렸다.

이날 행사는 파리교통공사(RATP)가 프랑스 종교기념일인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아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하기 위해 기획됐다. RATP에서 구식열차의 수리와 보존을 담당하는 데프렐은 "1930년에 제작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이 열차는 힘이 좋다"고 말했다. 스프라그-톰슨 열차는 26년부터 35년 사이에 영국인 스프라그와 미국인 톰슨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양쪽 끝에 두개의 기관차가 있고 중간에 객차가 있는데, 중앙에 있는 객차를 1등석으로, 나머지는 2등석으로 사용했다.

열차 내부의 모습은 20~30년대 프랑스 지하철 열차를 그대로 보여주는 박물관이나 다름없었다. 천장에는 실내를 밝혀주는 백열전구가 드문드문 붙어 있다. 바로 아래에는 지금 지하철에서는 볼 수 없는 짐칸도 있다. 객차마다 제복을 입은 차장이 문 옆에 배치됐으며, 이들은 출발 전 종을 울려 기관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문 위에는 '역사와 기차 안, 심지어 2등칸에서도 표 검사를 할 수 있으니 표를 잘 보관하십시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RATP가 이날 행사를 구간별 운행시간까지 널리 알린 덕분에 역마다 스프라그-톰슨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몰렸다. 승객들은 역에서 일렬로 줄을 서서 기다리다 열차가 들어오면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퍼부었다.

승차한 다음에는 옛날 열차의 모습을 구석구석 카메라에 담았다. 스프라그-톰슨은 현재의 열차와 비교해 운행 중 심하게 흔들렸고 소음도 컸다. 그러나 이 열차는 현대식 열차들 사이에 끼여 다른 열차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모든 운행을 무사히 마쳤다.

이번 행사는 사실 최근 들어 급감한 외국인 관광객 등을 겨냥한 파리 당국이 벌이는 각종 '몸부림'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라크전 때문에 빚어진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 유로화의 강세로 해외 여행객, 특히 돈 잘 쓰기로 유명한 미국인 관광객이 줄었기 때문이다. 보르도 지역까지 들르는 유람선 관광객은 최근 2~3년간 평년의 30% 수준이라고 한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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