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프라를세우자>24.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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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편의 시를 쓰고 음악을 연주하는 문화예술 활동은 대량생산시대에 역행하는 수공업시대의 산물이다.그래서 오늘날 국가나 기업의 지원없이는 문화예술은 존속할 수 없다.예술을 시장논리에만 맡겨둔다면 고급 문화예술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오는 18일로 창립 3주년을 맞는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Korean Business Council for the Arts.이하 KBCA)의 결성은 지난 93년 12월18일 기업인.문화예술인이 참석한 청와대 오찬에서“정치자금을 문화에

투자하는게 좋겠다”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일본에 이어 프랑스식 모델을 받아들여'메세나'라는 용어를 도입했다.그동안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의 후원과 투자가 없었던게 아니지만 산발적.개별적으로 이뤄져 즉흥적.일회성 지원이 많았던게 사실.

'메세나'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메세나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메세나협의회 초대회장을 맡고 있는 동아그룹 최원석(崔元碩)회장이 첼리스트 장한나양에게 1백만달러짜리 1747년산 과다니니 첼로를 기증하면서부터.메세나협의

회가 마치 신동 연주자에게 악기를 사주거나 대여하는 단체로 일반에 받아들여진 측면도 없지 않다.그후 악기기증보다 악기은행식의 지원이 바람직하다는 여론에 따라 금호문화재단과 삼성문화재단에서 악기은행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KBCA의 1년 예산은 약7억원.회원사들은 1계좌 2백만원씩의 연회비를 납부하고 있다.KBCA는 이 예산으로 홍보출판사업,정보수집및 조사연구,심포지엄 개최,창립기념음악회,국제교류등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KBCA 회원사는 1백61개.출범 당시부터 경제단체장들의 주도하에 설립된 것이어서 외국에 비해 기업의 참여율이 높은 편에 속한다.KBCA의 집계에 따르면 한국기업의 문화예술지원은 94년 3백94건.6백억원에서 95년 9백88건.9백26억원,96년 1천1백83건.1천1백78억원으로 2년만에 거의 지원액수가 두배나 증가했다.

96년의 경우 미술관.문화회관 건립과 도서관.박물관 시설지원등 문화인프라에 대한 기업의 투자가 4백23억원으로 크게 늘어나 지원 총액의 36%에 달했다.

지원형태도 지난해의 경우 기업이 자체로 주최하는 문화예술사업이 전체의 45%를 차지하고 후원 또는 협찬이 30%에 달한다.기업이 자체적으로 미술관이나 공연사업을 운영하거나 기업 명의로 이벤트를 주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각 기업들이 공연장.미술관 건립등 문화인프라 구축에 대한 관심이 늘었고 지방 연고지에 대한 문화지원 사례도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KBCA 사무국에는 지원을 호소하는 문화예술 단체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지만 지원신청에 대해 협회 차원에서 결정이나 추천을 하지 않고 있다.프랑스와 일본의 선례에 비춰볼때 지원 결과를 놓고 후원기업과 예술단체간의 난맥상을 보일

경우 협회가 이를 중재하거나 책임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따라서 정보는 제공하지만 최종적 판단은 회원사에 맡기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지속적인 장기 프로젝트보다 일회성.홍보성 이벤트 위주에 지원이 많다는 점.그래서 지원 건수에 비해 지원총액이 적은 분야가 많다.외국의 경우 최소한 5년간 지원해줘야 소기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정설로 돼있다.'한

탕주의'로 끝낸다면 기업이나 문화예술단체 모두에 아무런 플러스 효과를 낼 수 없다.

문예진흥원에 지원대상을 지정해 주는 조건기부금을 통한 지원을 제외하면 세제혜택이 전혀 없어 협회 차원에서 세금감면등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또 기업의 자기자본 비율이 낮다 보니 여유자금이 없어 기업이윤의 일정 부분을 문화예술

에 지원하지 않고 경상비나 홍보비의 일부를 지원금으로 할애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몇몇 대기업의 경우처럼 문화재단 설립을 통한 운영이 시급하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대상과 지원액수의 결정이 최고경영자의 결정에 따르는 경우가 80% 이상이다.그래서 일부 문화예술단체에서는 실무자와 접촉하는 것보다 경영진과의'직거래'를 선호한다.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기업 나름대로 특징있는 문화사업 개발이 절실한 만큼 특성화 추세에 맞춰 실무선으로 결정권이 이양될 가능성이 높다.

필립 모리스사는 65년부터 팝아트(pop art)를 본격 지원하고 있는데 이 결정은 마케팅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최고경영자의 예술적 취향에만 맡겨 놓을 수는 없는 추세다.

국민이나 예술단체들이 알고 싶은 것은 지원 여부가 아니라 지원을 결정한 판단기준이다.지금과 같은 모호한 기준으로는 역효과만 초래할 뿐이다.기업내에'기업문화부'같은 것을 두고 문화지원활동을 진행하는 전문인을 육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일선 담당자들이 자주 바뀌어 지원에 일관성이 없다.그런 뜻에서 예술경영 전공학도는 예술단체나 기업 모두에 필요한 인력이다.

메세나에서도'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는 적용된다.대기업이 양적으로나 금액면에서 우월하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문제는 질(質)이다.바로 이런 점을 적극 계몽.홍보하는 것이 기업메세나협의회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사진설명>

95년5월 포항제철이 문화인프라에 대한 투자의 일환으로 건축비중 50억원을 지원해 완공된 포항문화예술회관 개관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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