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 '새 안보선언' 검토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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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17일. 한.미 국방장관은 21세기 한.미동맹의 방향이 든 '역사적' 공동성명을 냈다. 서울에서 열린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다. 성명은 한.미동맹의 틀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임을 예고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이 지속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4항), "한.미동맹을 변화하는 세계 안보환경에 적응시키고…"(6항), "한.미동맹이 동북아와 아시아.태평양 전반의 평화와 안정을 증진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11항).

이 가운데 4항은 주한 미 2사단의 이라크 차출로 현실화됐다. 6, 11항은 대북 억제 위주의 과거 한.미동맹의 역할은 끝났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성명에 비춰보면 "주한미군을 전 세계 작전에 투입할 수 있다"는 찰스 캠벨 한미연합사 참모장의 최근 발언은 표현만 직설적일 뿐이다.

그러나 당시 이 조항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용산기지 이전 문제에 관심이 집중된 데다 정부도 행간에 숨은 뜻을 적극 알리려 하지 않았다. 미국의 2사단 이라크 차출 통보가 우리 사회에 격진을 몰고온 것은 이와도 맞물려 있다. 한 전문가는 "현재 한.미 간에 이뤄지고 있는 동맹 재조정의 지향점과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 한 재조정 내용 일부가 새나올 때마다 여론은 춤출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한.미동맹 재정의(再定義)론이다. 한.미동맹 재조정 작업이 본격화한 만큼 새 안보선언을 통해 동맹의 비전, 역할, 활동 반경 등 큰 틀부터 새로 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미동맹에 관한 국민적 합의도 도출되고, 미국의 움직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게다가 한.미동맹도 테러.대량살상무기.마약.전염병.해적 등 세계적 차원의 새 안보위협 요소를 비켜갈 수 없다. '몸집'이 바뀌었으면 '옷'도 바꿔 입어야 한다는 얘기다. 박용옥 전 국방부 차관은 "한.미동맹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급선무라는 차원에서 정부가 1996년 미.일 간 신안보선언 같은 것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미.일 신안보선언은 뿌리째 흔들리던 미.일동맹을 거듭나게 해준 전환점이었다. 당시 미.일동맹은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의 여중생 성폭행 사건, 경제 마찰, 일본 내 내셔널리즘으로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미.일동맹 해소론까지 나왔다. 이를 막기 위해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와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내각이 내든 카드가 '미.일 안전보장 공동선언-21세기를 향한 동맹'이었다. 이 선언은 미.일동맹이 자유.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가치를 공유한 동맹으로서 아태 지역 안정과 번영 유지의 초석임을 확인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미.일동맹은 이 선언을 통해 특정 적국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정,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테러 위협의 방지 등 포괄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면서 "이 선언은 한.미동맹 재조정의 한 모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동맹 재정의와 관련해선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발전적 개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는 얘기들이 많다.

다른 과제도 한둘이 아니다. 주한미군 해외 출동 사전협의제는 발등의 불이다. 윤 교수는 "주한미군이 기동군으로 바뀌는 만큼 해외로 작전 출동할 때는 우리와 반드시 협의를 거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장기적으론 한미연합사 해체와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도 준비해야 한다. 주한미군 사령관(대장)이 전시 작전을 지휘하는 체계는 주한미군의 상시 주둔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동맹 재조정에 따른 대주변국 외교 강화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중국에 대해선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전략 변화, 테러 등 새로운 안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민석.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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