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파국의 역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푸라기 한 묶음이 낙타를 쓰러뜨린다고 하면 웃을 것이다.낙타 등에 짐을 싣는 경우를 생각해보자.낙타가 버텨줄 때까지 꾸역꾸역 올려놓는다.그러나 어느 수준을 넘어 지푸라기 한 묶음이 더 얹혀지는 순간 낙타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진다.지푸라기 한 묶음의 무게는 낙타의 거대한 덩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낙타의 쓰러짐과 이렇다 할 함수관계도 없다.그러나 그 사소한 무게의 보탬이 낙타를 무너뜨린다.

김영삼(金泳三)권력의 붕괴도 비슷한 맥락이다.PK 위주의 일사불란한 공권력,무소속을 입당시키고,야당의원들을 탈당시켜 과반수를 확보할 때까지만 해도 그 세(勢)는 막무가내였다.그 다음'그까짓 날치기 한번쯤'의 오만이 바로 한 묶음의 지푸라기였다.

베이징(北京)에서 나비의 가벼운 날개짓 바람이 한달후 미국 뉴욕주에 폭풍우를 몰고 온다.이른바 카오스(혼돈)의 역학이다.국제금융시장,특히 외환시장은 판더모니엄으로 불린다.밀턴의'실낙원'에 나오는 지옥의 수도다.혼돈을 조성하며 그

혼돈을 먹고 사는'악마'들의 투전장이다.

컴퓨터 키보드로 하루 1조달러가 빛의 속도로 국경을 넘나든다.개별국가 정부나 중앙은행들은 갈수록 무력해진다.상어가 먹이에 달려들듯 한번'투기적 공격'이 시작되면 남아나는 나라가 없다.영국의 파운드화가 평가절하의 굴욕 속에 유럽통화

권 바깥으로 나가 떨어진 것도,94년말 멕시코 경제가 외환위기로 거들난 것도 이 힘의 작용이었다.'은행이 망해도 정부가 지원을 않겠다'는 청와대 경제수석의 원론적인 말 한마디가 한국의 대외신용에 회오리를 몰아온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멕시코 위기에 대한 국내의 시각은 두갈래다.이러다간 우리도 멕시코짝이 난다는 심각한 우려가 그 하나다.우리 경제의 실력및 잠재력이 멕시코와는 비교가 안되며,따라서 크게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는 주장이 다른 하나다.둘다 옳은 얘기다.

현시점에서 한국의 국가위험 수준은 멕시코 위기 당시의 위험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우려할만한 수준에 육박해가고 있는 현실이 문제다.국제금융의 흐름은 불규칙적이다.인과관계가 딱 떨어지지 않는다.이른바'비선형(非線形)'의 역학이다.지표로

는 멀쩡한 경제도 위기는 닥친다.흑자기업이 도산하고,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뇌동맥경색으로 졸지에 쓰러지는 것과 같다.위기는 조그만 혼돈의 낌새나 빈틈을 파고 든다.우리의 경상수지적자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외환보유고는 줄어들고 악성

단기외채의 비중은 날로 높아간다.달러 가수요로 환율은 치솟고 외국자본은 속속 빠져나간다.이들 움직임 어느 하나에 갑자기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사태는 금세 겉잡을 수 없게 된다.아직 금융의 개방화가 덜 돼 핫머니나'악마'들의 투기적

공격의 소지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방심할 때가 아니다.'폭풍우'는'나비의 날개짓바람'으로 족하다.30대 기업그룹중 90%가“멕시코사태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외환위기의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는 현실인식이 섬뜩하다.배가 난파조짐을 보이면

쥐들부터 달아난다.물을 퍼내고,자본도피 등 새는 구멍을 막는 외환위기관리팀의 본격가동이 화급하다.도처에 가스가 널려있는 상황에서 성냥불은 금물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경제의 대외 신인(信認)과 정책의 신뢰를 회복하는 국가적 의지표명과 노력이다.정권이 바뀌어도,정국이 혼미해도 경제만은 일관성을 갖고 지속적으로 추진된다는 국가적 합의를 대내외에 인식시키는 일이다.중기안정화계

획을 수립하고 누가 정권을 잡아도 구조조정을 일관성있게 체계적으로 밀고 간다는 것을 행동으로 실증해야 한다.우리 경제가 어떻게 해서 불과 4년 사이 이토록'기(氣)'가 빠지고 주저앉을 수가 있을까.한마디로'국가경영의 공백'때문이다.

대통령 잘못 뽑으면 30여년의 공든 탑도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는 교훈을 우리 모두가 뼈저리게 새겨야 한다.뒤뚱거리는 배로 격랑을 헤쳐나가는 데는 노련한 선장이 제격이다.'정치9단'이나'대쪽'이 아닌 유능한 국가경영자가 절실하다. 변상근 (편집국장대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