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곁의문화유산>가야산 법수사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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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성주에서 가야산 백운동고개를 넘어 합천 들어서기 직전,길 왼편에 작은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크지도 작지도,강건하거나 유약하지도 않은 평범한 모습이라 무심히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막상 차에서 내려 탑 가까이 가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어긋어긋 가야산의 암봉들이 탑의 등뒤에서 춤추는 듯하고,탑의 발 아래로는 산줄기들이 굼실굼실 멀어져가는 호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이 법수사라 불리던 절터다.최근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고 있던 목조 비로자나불상 속에서 고려말인 1326년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완전한 형태의 옷가지 여러 점이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그 비로자나불상이 바로 법수사 출신이다.

조선 중엽에 법수사가 폐사된 후 가야산 중턱의 용기사로 옮겨졌다가 그마저 문을 닫게 되자 해인사로 또다시 옮겨졌던 것이다.2.35에 달하는 이런 큰 불상을 모시고 있던 절이니,법수사의 옛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해인사와 함께 가야산 이쪽저쪽에서 쌍벽을 이루던 큰 절이었던 듯 근거는 없지만 한때 아홉개의 금당,여덟개의 종각등 무려 천칸이 넘는 건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불국사 대석단이나 부석사 석축과 견주기는 어렵지만 크고 작은 돌들이 성글게 맞물리면서 내는 거친 멋이 있다.꼼꼼한 손맛보다 선이 굵은 마음맛이라고 할까.남아있는 돌축대는 대충 1백 정도 될 듯한데,일부는 이미 무너져내려 보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돌축대 아래로 더 내려가면 중기마을.경지정리를 하지 않아 크기도,모양도 들쭉날쭉 정겨운 논 사이로 가지를 풍성히 뻗은 느티나무가 보인다.마을 당산나무인데 특별한 장식이 없는 소박한 형태의 당간지주가 함께 서 있다.

모심기 이전 미나리꽝이 돼버린 파릇한 논 가운데 겨우내 품었던 속살을 돋아내는 노성한 당산나무와 당간지주가 어울린 풍경은 퍽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마을사람들은 이 당간지주를'장군 젓가락'이라 부른다.

그밖의 법수사터 흔적으로는 석탑 앞뒤로 석등과 불상 대좌의 일부 부재가 남아있고,주변 밭둑과 생수장식당에 주춧돌.배례석등이 흩어져 있다.

▶가는길=성주에서 33번 국도를 따라 고령으로 가다 닿는 수륜에서 다시 997번 지방도로로 길을 바꾸어 해인사 방면으로 6.2㎞ 가면 길 왼쪽에 법수사터가 있다.

글=김효형〈한국문화유산답사회〉 사진=김성철〈사진작가〉

<사진설명>

법수사터에 남아있는 당간지주는 웅장했던 절의 규모를 가늠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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