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기계 만드는 교육세태에 돌아본 뼈대있는 배움터 家門. 宗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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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근대화과정에서 잃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돌아보는 길목,그 외진 곳에 종가가 있다.택리지에서 명당으로 지목한 곳에 위치한 안동 토계마을 퇴계 이황 종가와 하회마을의 서애 유성룡 종가.이중 하회는 숲속에 숨어 핀 꽃과 같다.옛날 그 터를 찾아낸 조상의 안목이 새삼 드높아 보인다.퇴계 종가를 가보면 외롭게 산을 등에 지고 돌아앉아 있다.고택(古宅)에서 보이는 집이 없을 만큼 지금도 고택(孤宅)이다.

조부는 젖 뗀 손자를 데리고 사랑에서 기거했다.아이는 할아버지의 손길과 숨소리에 잠깨고 조부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하루 생활을 시작했다.어른들 옆에 앉아서 듣고 본 문견(聞見) 이 아이를 집안의 아이로 형성시켰다. 누구도 말로 설득하거나 논쟁하지 않았지만 사람이 됐다.늙은 할아버지를 위해 뜨겁게 불 땐 방에서 잠 못이루고 뒤척였던 것이 종손들에겐 고달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조부의 애정과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조부는 매를 때릴 때 아이에게 회초리를 가져오게 했다. 스스로는 감정을 삭히고 아이에게는 자성할 시간을 줬던 것이다.종아리를 맞게 한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감정적 매질의 위험을 경계한 까닭이다.

종가의 조상들은 사려깊고 치밀한 사람들이었다.전란(戰亂)과 병화(病禍)를 걱정해 산자락 속에 집을 숨겼고,자손들의 무지와 게으름을 가장 염려했으며,출세와 축재를 경계했다.2백 마지기의 땅과 연 3백섬 이상을 소유하지 말라고 자손에게 일렀다.승지보다 높은 벼슬을 하지 말라고 이르기도 했다.나갈 때와 물러날 때(進退)를 가리라고 일렀고,물러날 때는 물레 하나라도 제자리에 두고 그 날로 곧장 서울을 떠나라고 당부했다.

반가(班家)의 아이라면 예를 알고 정신적 풍요로움을 값지게 여긴 선비의 도를 따라야 했다.형벌보다 무서워한 것은 문중사람들의 질책이었으며,가난보다 두려운 것은 자식이 학문에 뜻을 두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들이란 말로써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어른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저절로 몸에 배도록 하는 종가식 교육법은 요즘 교육풍토에서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이순형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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