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제로금리, 만병통치약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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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원래 제국이란 다른 나라를 정복한 뒤 그들로부터 공물을 받아 제국의 유지·관리 비용에 충당한다. 로마제국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에서 등장하고 사라졌던 모든 제국이 다 그렇게 했다.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지도, 공물을 걷지도 않는다. 그 대신 다른 나라에 채권을 판다. 미국의 가계와 정부는 과다 소비를 지속하고, 다른 한편에선 경상수지 적자가 계속 누적되는데도 여기에 필요한 자금을 다른 나라에 채권을 팔아 충당해온 것이다.미국은 또 대외채무가 한계 수준에 이르면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려 실질적 상환부담을 줄이는 방식도 반복해 왔다. 1980년대 중반의 플라자 합의, 2002년에서 2005년까지의 달러화 가치 하락이 그런 사례였다. 강제로 공물을 걷어가지는 않지만 달러 가치의 하락이라는 일종의 인플레이션 조세를 걷어가는 것이다. 며칠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선택한 제로금리와 양적 완화(무제한 자금 공급) 정책도 그러한 패턴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제로금리와 양적 완화는 일본이 장기침체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해 보았던 극약 처방이다. 효과도 별로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때마침 디플레이션이 오는 바람에 일본의 실질금리는 플러스로 돌아서, 경기가 살아나지 못했었다. 또한 금융 구조조정이 지연되다 보니 제로금리에도 불구하고 돈이 돌지 않았다. 다만 국내 자산의 수익률을 극도로 낮추어, 소위 ‘와타나베 부인들’로 하여금 해외투자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엔화 가치를 떨어뜨릴 수는 있었다. 이는 주기적으로 일본 경제의 성장세를 꺾어 왔던 엔고를 피하고, 2002년 이후의 경기 확장세가 전후 최장 기간 지속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제로금리는 결코 좋은 정책이 아니다. 미국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이 집값 하락 자체보다 그것을 초래한 빚잔치에 있다고 본다면 제로금리는 부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저축을 줄인다는 점에서 근본적 치료책이 될 수도 없다. 또한 금융경색이 지속되는 한, 제로금리와 양적 완화만으로는 돈이 돌도록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만 일본과 달리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은 아직 2% 수준이므로, 적어도 당분간은 마이너스 실질금리를 통해 어느 정도의 경기부양 효과를 기대해 볼 수는 있다. 보다 분명한 것은 제로금리가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려 미국의 부채상환 부담을 다른 나라에 분담시키는 효과를 거둔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제로금리는 달러 가뭄에 허덕여온 전 세계 금융시장에 일단은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엔 일본도 제로금리로 복귀할 조짐이다. 그러나 좀 더 멀리 보면 이런 흐름은 국제 금융시장을 새로운 안개 속에 빠뜨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 세계 차원의 통화전쟁과 환율전쟁이 촉발될지 모른다.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이 세계 금융시장을 떠돌면서 새로운 버블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크다. 제로금리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끔찍한 위기상황의 반복을 예고하는 신호탄일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미국이라면 해결의 열쇠도 결국 미국이 쥐고 있다. 미국이 아메리카 제국의 삶의 방식, 즉 채권을 팔고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리던 종래의 패턴을 답습하면 미래는 어둡다. 만약 ‘변화’를 내세운 오바마 행정부가 절약과 근면을 미덕으로 삼던 개척시대의 정신을 회복시킨다면 그것은 좋은 징조다. 공화국의 건전한 삶의 방식을 되찾아 상품을 만들어 내고 빚을 줄여 나갈 경우 향후 국제 금융시장과 세계 경제의 흐름은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