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의 시네 알코올]붉은 체리 한 알의 안쓰러운 관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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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호 07면

요즘 한국 사람은 칵테일을 별로 안 마시는 것 같지만(폭탄주 빼고), 서울 도심에 칵테일 바가 즐비하던 때가 있었다. 1980년대 후반, 그러니까 소주와 맥주 말고 다른 술 좀 마셨으면 좋겠는데 원액 100% 위스키는 수입이 안 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칵테일을 적잖이 마셨다. 그 대표선수가 ‘진 토닉’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장선우·1990)과 ‘해태 런던드라이진’

나도 88년에 군 제대하고 취직 준비하느라 도서관을 들락거릴 때 가끔 광화문에 있는 한 칵테일 바에 갔었다. 테이블은 없고 여자 바텐더 둘이 각자 스탠드를 하나씩 맡아 스탠드 건너편에 앉은 손님에게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 ‘건전한’ 곳이었다. 백수 주제에 많이 마실 수는 없고, 그저 한두 잔 마시고 나온 게 진 토닉이었다. 그 바의 진 토닉 한 잔 값이 생맥주 500mL 한 잔과 비슷했던 것 같다.

취하지도 못 할 거, 그 짓을 왜 했을까. 바텐더 중 한 명,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던 누나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 그 진 토닉이 맛있었다고 해서 그게 온전히 술맛이라고 하기 힘들겠지만, 여하튼 진 토닉의 맛은 솔 향(정확하게 노간주나무 열매 향)이 상큼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진을 많이 넣어 달라고 해서 마시면 한 잔으로도 가벼운 취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레몬 조각과 함께 들어간 빨간 체리(통조림 체리였다) 한 알! 그걸 뭐라고 할까. 노골적이고 촌스럽기까지 한데, 솔직해서 천박해 보이지 않는 관능?

장선우 감독의 1990년 작 ‘우묵배미의 사랑’에 그 통조림 체리, 진 토닉 잔 안에 혼자 발가벗고 들어가 사람들의 시선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체리 한 알이 나온다. 결혼은 안 했지만 여자와 아이까지 낳고 사는 사실상 유부남 배일도(박중훈)와 유부녀 민공례(최명길)가 서울 난곡의 봉제 공장에서 일하다가 만난다. 서로에 대한 호감이 조금씩 커 가다가 월급날에 둘은 술 마시고 도망치듯 서울을 벗어난다.

둘이 탄 택시는 서울 근교의 한 모텔 앞에 섰는데, 영화 화면에도 모텔 간판이 크게 잡히는데, 둘은 모텔로 바로 안 가고 그 옆의 카페에 들어간다. 그 시대에 정해진 수순? (아니, 지금도 그런가?) 반쯤 밀폐된 카페의 한 구석 테이블에, 둘이 마주 앉지 않고 나란히 앉아 급히 마시는 술잔에 빨간 체리 한 알이 보인다. 둘은 저 술 마시고 아까 그 모텔로 갈 거다. 아닌 게 아니라 키스한다, 더듬는다….

컷 하고, 둘이 마신 술은? 단지 진 토닉이 아니라, 진과 토닉워터를 섞은 그 칵테일에 들어간 진의 이름은? ‘해태 런던드라이진’이다(영화엔 술병의 목 부분만 보이지만, 장선우 감독이 해태 런던드라이진이라고 직접 말해 줬다). 그 당시 술집에서 진 토닉이나 슬로 진 같은 진 베이스의 칵테일을 만들 때 쓴 게 해태 런던드라이진 아니면 ‘쥬니퍼’였다. 해태 런던드라이진은 해태주조가, 쥬니퍼는 진로가 각각 만들어 서로 경쟁하던 국산 진, 좀 더 정확하게 진 원액이 섞인 기타재제주다.

원액이 얼마만큼 섞여 있는지에 대해선 자료가 없지만 위스키·브랜디·럼·보드카 등 스피릿(독주) 가운데 진이 제일 싼 술인 만큼 제법 많이 섞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해태 런던드라이진은 ‘베리나인’ ‘캡틴 큐’ 등 이름을 기억할 만한 다른 기타재제주들이 만들어지기 전인 74년에 나온, 고참 가운데서도 왕고참 술이다. 이름은 이국적이지만, 싸구려 술에 더 싼 술을 섞은 기타재제주인데(주세법 개정 이후의 세법상 명칭은 일반증류주다), 싸구려이면 어떤가. 빨간 통조림 체리 한 알로 들이미는, 그 미숙한 관능이 안쓰럽지 않은가.

이 영화는 그 안쓰러움을 예리하게 잡아챈다. 일도와 공례는 그날 모텔엔 갔지만 하지 못했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매일 맞고 사는 공례이지만, 애까지 있는 처지에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됐기” 때문이다. 마침내 공례가 마음을 정리한 날, 마음이 한껏 들뜬 일도는 자기 딴에는 관능을 공유하겠답시고 공례를, 야한 쇼를 벌이는 성인나이트클럽에 데리고 간다. 하지만 그건 관습, 혹은 관성이지 관능이 아니었다. 낯설고 불안해하는 공례를 보면서 일도는 참담해진다. 애당초 남들이 하는 방식을 좇아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관계였다.

여인숙에서 일도의 자책감이 공례의 위로로 순식간에 풀리며 둘이 살을 섞은 뒤부터 둘은 자기들만의 관능을 눈처럼 쌓아 간다. 그게 그들만의 것일진대 촌스러우면 어떻고, 미숙하면 어떤가. 마누라에게,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비닐하우스에서 섹스하다가 주민들에게 들키고, 둘이 도망쳐 살다가 마누라에게 적발돼 사타구니를 붙잡힌 채 동네 골목길을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워하다가, 웃다가, 묻게 된다. 남들 하는 대로 좇아서 하는 것도 사랑일 수 있는가. 세상과, 공동체와 불화(不和)하지 않는 사랑이 사랑일 수 있는가.

원래 런던드라이진은 그 자체로 보통명사다. 진이라는 술은 1600년대 네덜란드에서 신장질환·담석 등의 치료제로 개발됐다가 1688년 명예혁명 뒤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가 영국 왕이 되면서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 아직 위스키가 나오기 전인 당시에 영국 정부는 수입되는 독주들에 큰 세금을 부과하면서, 진에 대해선 무허가 제조를 묵인했다. 맥주가 비싸던 시절에 가난한 이들은 진을 엄청나게 마셨고 질 나쁜 진도 많아 진 음주로 인한 사망률 증가가 산업혁명 당시 런던의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역할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진이 좀 더 정제돼 나오기 시작한 게 1830년대부터이고, 이후 개발된 새 제조법에 따라 만들어진 진을 런던드라이진이라고 부른다. 곡물 증류주에 주니퍼베리(노간주나무 열매) 향이 들어간 게 진인데, 런던드라이진은 곡물 증류 원액에 주니퍼베리(상표에 따라 아니스·오리스·계피·고수 등을 섞어)를 첨가해 한 번 더 증류해 만든다.

해태 런던드라이진은 제조사가 해태산업에서 해태주조로 바뀌었다가, 99년 해태 그룹이 사라지면서 해태주조도 문을 닫았다. 해태주조에서 나오던 술 가운데엔 런던드라이진 말고도 ‘해태 나폴레옹’ ‘마패 브랜디’가 있었고, 많이 팔리진 않았지만 이름만큼은 흥미로웠던 위스키 ‘드슈’도 있었다. 이 중 런던드라이진과 나폴레옹을 국순당 자회사인 국순당L&B가 인수해 생산하고 있다. 해태 런던드라이진은 국순당이 인수한 뒤 ‘버킹검 런던드라이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임범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시네필로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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