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필링>트집잡기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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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며칠전 영화 시사회에'불려가'(이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지금 본 영화에 대한 해설을 하라는 주문을 받았다.사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도 아닌 주제에 그 영화를 해설하러 관객 앞에 나서는 것 만큼 쑥스러운 일도 없다.

그래도 이런 자리에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나가는 가장 큰 이유는 여전히 영화에 관한 사유의 새로운 출발은 대화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종종 내 경험으로 영화에 관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게 되거나 더 나아가 내가 알고 있던 개념 자체를 교정받아온 것은 비전공자들과 만나 자유롭게 무슨 이야기든지 할 수 있을 때였다.

내가 타르코프스키의'희생'이라는 영화를 정말 이해하게 된 것은 어느 가톨릭교회 문화강좌시간에 만난 한 할머니를 통해서였다.온갖 그럴듯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나는 이 할머니가 내게“정말 감동적이었어요.나는 이 영화를 두번이나,앉은 자리에서 두번이나 보았지요”라고 말했을 때만해도 속으로 설마라고 생각했다.할머니는 뒤이어“내 생각에 이 영화는 밤새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리며 떠오르는 잡념들과 마주 싸우는 것같았거든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자서전에서 그가'희생'에 대해 써놓은 알 수 없었던 기호의 의미를 처음 풀 수 있었다.

내가 이번 자리를 기대한 것은 시사회에 초대된 사람들이 대학 새내기들이었다는 사실이다.소위 말하는 문화이론이니,아니면 너무 서둘러 읽은 것이 분명한'패스트푸드점의 철학자'들 이름 따위는 잊어버리고 갈 수 있는 자리를 나는 내심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영화는 끝나고 토론이 시작됐다.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자리엔 흥분도 없었고,사랑도 없었고,향수란 더더구나 없었다.새내기들은 무언가 잘못 생각한 것같았다.이 영화감독은 충분히 삶에 관해 배울만한 시선을

갖고 사람들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있었으며,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 토의해볼만한 결론을 남겨놓고 있었다.그런데 그들은 트집을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심술쟁이들 같았다.토론은 점점 꼬여만 갔고,이미 나는 지루해지고 있었다.여기저기서

읽은 영화평의 단편적인 문장들이 가면을 쓰고 출몰했고,이미 눈치챈 몇몇 새내기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토론의 자리가 끝나는 순간 내게 떠오른 말은'서둘러 공부한 사람은 비판하지만 오랫동안 사유하여 얻은 깨달음은 칭찬한다'는 스피노자의 경구였다.나는 이것이 거품처럼 떠오른 젊은 영화광들의 열광이 일시적인 소란에 불과한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증거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내내 근심을 떨칠 수 없었다. 정성일〈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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