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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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여자의 이름은 도봉화였다.봉홧불을 연상시키는 이름이었는데,그것도 옥탑 전세방을 얻어 살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였다.4층 옥상 위에서 홀로 타오르는 봉홧불.

아닌게 아니라,봉화의 방에 유선방송 동축선을 설치해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구환이 잠을 자는데,시험방송 화면의 영향 탓인지 꿈속에서 고성군 산불과 같은 불길이 동네를 휩싸는 광경을 보았다.봉화가 살고 있는 집 건물도 화염에 싸이

고 말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층수를 따라 차례로 불이 꺼지더니 옥상 위 봉화의 옥탑 전세방만 불길을 피워올리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위기에 처한 동네의 상황을 널리 알리는 봉홧불처럼 봉화의 방이 타고 있었다.

구환은 봉화를 구하려고 그 옥탑에까지 달려 올라갔다.봉화는 불길에 갇혀 미처 방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구환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봉화를 끌어안고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구환마저 불길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둘은 꼭 끌어안은 채 점점 다가오는 불길의 뜨거운 기운을 느껴야만 하였다.그런데 봉화의 몸이 밀착되어 있는 구환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등줄기를 타고 불길 같은 것이 내려오

더니 사타구니로 확 번졌다.

그 순간,구환은 몽정을 하고 말았다.얼마나 많은 양의 액체를 쏟아내었는지 옥탑에 붙은 불길을 끌 정도였다.

그런 해괴한 꿈을 꾸고 나서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봉화로부터 구환을 찾는 전화가 유선 방송국 사무실로 걸려왔다.구환이 예상했던대로 봉화는 고장신고를 하고 있었다.구환이 봉화의 방으로 찾아가니 텔레비전 화면이 치직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죠? 유선 방송국에서 녹화를 잘못 한 거 보내주는 거 아닌가요?”

구환이 텔레비전 안테나 단자판을 살펴보니 동축선 연결이 헐거워져 있었다.암볼트를 조여주자 텔레비전 화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어쩌면 봉화가 고장신고를 하기 위해 일부러 볼트를 느슨하게 해놓았는지도 몰랐다.

“이건 고장도 아닌데.화면이 잘 나오지 않으면 여기부터 봐야 한다니까.동축선이 바람에 흔들리든지 하면 볼트가 저절로 헐거워질 수도 있으니까.”

“난 그것도 모르고 신고부터 했네요.이거 미안해서 어떡하나?”

그러면서 이전처럼 또 봉화가 오렌지 주스를 내어놓았다.

“하긴 텔레비전 수상기가 고장났는데도 유선방송이 고장났다고 야단을 치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

구환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넌지시 봉화를 건너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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