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기행>브뤼셀 왕립미술관- 브뤼겔 그림의 리얼리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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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농부가 쟁기를 끌고,양치기가 양떼를 돌보다 잠시 쉬고,어부가 낚시를 하는 한가로운 풍경.바다엔 범선이 떠있고 멀리 수평선너머 태양이 빛난다.그런데 그림의 제목은 엉뚱하게도'이카로스의 추락'(1555~58년 작)이라고 붙어 있다.이

카로스(Ikaros)는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다 태양에 가까이 가는 바람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하는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이다.

브뤼셀의 왕립미술관에서 브뤼겔(Pieter Bruegel.1525/30~1569)의 작품을 보며 나는 적이 당황했다.화면을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한 소년이 사라진 자취가 가뭇 없다.이 잡듯이 샅샅이 눈으로 캔버스를 뒤진 뒤에야

겨우 그 몸의 일부를 발견했다.오른쪽 하단에 물결위로 삐죽 솟은 형태가 발버둥치는 인간의 다리같다.그런데 그 크기가 중앙에 우뚝 선 농부의 두드러진 전신상과 비해 손톱만치 조그맣게 그려져 눈에 띄지 않은 것이다.소년이 추락한 장소

가 신화에서처럼 지중해가 아니라 화가가 살았던 플랑드르 지방의 바다,즉 북해의 풍광에 가깝게 그려진 것도 상식의 허를 찌른다.그 광활한 바다에 빠진 이카로스는 가느다란 갈색의 막대로서,두 토막의 살덩이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너무 높이 날다 변을 당한 이카로스는 자신의 과욕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했다.한 인간의 예기치 못한 재난 앞에서 세상은 정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하늘도 땅도 바다도 평화롭기 그지없다.전경에 등장하는 세

인물 가운데 어느 하나는 풍덩 물에 빠지는 소리를, 살려달라는 외침을 들었으련만…태평스레 자기일에만 몰두한다.이카로스처럼 제 아무리 특별한 인물일지라도 개인의 운명에 대해 세계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는 것.그 냉혹한 현실을, 도저(

到底)한 허무를 이처럼 딴청피우듯 유유자적 표현할 수 있었던 화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브뤼겔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벨기에 앤트워프의 길드에 소속된 화가로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돌아와 옛 스승의 딸과 결혼,브뤼셀에 정착해 활동했다는 것.그리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것-그의 삶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이게 다다.농민을 주로 그려'농민-브뤼겔'이란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브뤼겔은 실은 교양이 풍부한 인문주의자였다.브뤼셀에서 그는 '사랑의 가족'이라는 다소 신비주의적인 서클과 연루됐다고 한다.이 일종의 비밀결사조직은

1560년대 네덜란드를 분열시키고 있었던 종교분쟁에 직면해'중용'과'온건한 조화'를 옹호했다.중용이니 조화니 하는 것들이 불온하게 간주됐다니,16세기 북유럽에서 신.구교간의 갈등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그 혼란스런 사회상이

가위 짐작된다.그는 이도 저도 아닌 중간노선이 오히려 급진적일 수밖에 없었던 광기의 시대를 살았던 모양이다.

고대의 신화를 안일하게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16세기 플랑드르의 범속한 풍경 속에 집어넣어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했던 브뤼겔.그의 그림을 보며 내가 감탄과 동시에 쓴웃음을 지은 건 화가가 살았던 16세기나 지금이나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변하지 않는 인간의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발버둥치는 두 다리가 깨우쳐 줬기 때문이다. 〈시인 최영미〉

<사진설명>

브뤼겔의 작품'이카로스의 추락'(1555~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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