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감성 모자로 말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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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크리스티앙 디오르는'모자는 세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모자를 착용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갈파했다.이런 심리를 지닌 사람들이 많아진 것일까.복고풍 영화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모자들이 이제 서울의 거리에서

일상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세계적인 문화분석가와 패션정보분석가들의 기고를 통해 앞으로의 유행경향을 전망하는 잡지로 정평 있는 '텍스타일 뷰' 최근호에는 유행의 원천이 다시 1920년대 1차대전 전후의 스타일로 쏠리고 있다고 전망

했다.이른바 현실에 분노하고 허무에 몸부림치던 당시의 젊은이들의 실용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옷차림이 최근의 시대정신과 상통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얼마전 개봉된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의 영화'전쟁과 사랑'에서 젊은 헤밍웨이의 연상의 연인으로 나온 샌드라 불럭은 우아한 곡선의 챙넓은 샤포(chapeau)를 쓴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한편 모자의 유행은 옷차림의 전체적인 모

습이 바뀜에 따른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고급원단에 가장 단순한 선과 최소한의 디테일(세부 형태)에 의존하는 미니멀리즘 감각의 실루엣이 퇴조하고,몸매를 타고 흐르는 자연스런 실루엣에 낭만적인 장식이 곁들인 옷의 스타일이 제안됨에 따

라 상대적으로 맵시 있는 모자에 비중이 주어지게 된다.원시인들도 털이나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썼다고 추측된다.본격적인 여성용 모자가 착용된 것은 기원전 2100년께 크레타섬에서였다.그 당시 모자는 높이 솟은 컵모양에 얇은 테가 달린

것이 요즘 샤포의 모양과 닮아 있었다.이후 모자는 사람의 신분과 계급을 구별짓는 가장 강력한 표상이 됐다.바로크시대에는 괴상하게 부풀린 머리모양과 함께 재미 있는 모자들의 전성시대였으며,미국개척시대에 퍼진 실용적인 밀짚 보닛(bonnet)이 유럽으로 역류됐다.

남성용 펠트 해트(felt hat)의 유행은 원료인 비버가죽을 수출하는 미국과

유럽간의 통상마찰을 일으켰다.1차대전 전후에는 중산층 여인이 샤포를

쓰지 않고 외출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례함으로

여겨졌다.2차대전이후 모자를 쓰지 않고'머리만 쓰는(wearing hairs)'현상이 확산되면서 현대패션에서

모자의 지위는 급속하게 약해졌다.

그러나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복고취향적인 뉴룩(new look)은 챙이 매우

넓고 경쾌한 분위기를 지닌 샤포의 매력을 극도로 살려냈다.이후

파리컬렉션등 고급패션 발표무대를 통해 일군의 톱디자이너들은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디자인의 모자

를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다.미야케 이세이.고시노 준코등 특히 일본출신

디자이너들이 모자에 집착한다는 점이 이채롭다.미야케의 모자 혹은

머리장식은 컬렉션때마다 경탄의 대상이 된다.금속.플라스틱.생물체등

상식을 벗어난 소재로 만들어진

전위적인 모자들은 미술의 오브제(소재)같은 느낌까지 준다.최근 내한한

고시노는 그녀의 컬렉션에서 두사람 혹은 세사람이 나란히 쓰고 갈 수

있는 대형 샤포를 발표해 모자의 초현실적 분위기를 전해 주었다.

모자로 톡톡히 재미를 본 스타들로는 1930년대의 마를렌 디트리히와

그레타 가르보가 있으며,80년대의 다이애나비(妃)도 화사한 색깔의

샤포로써 자신의 개성을 굳혔다.약간 비스듬히 쓴 샤포에 가려 가르보의

얼굴에 생긴 매혹적인 그림

자는'가르보의 그림자'라는 미학적인 패션용어로 남았다.

모자의 종류는 크게 정장용과 스포츠용으로 나눌 수 있으나,최근 유행의

중심은 정장풍 모자에 집중된다.이른바 야구모자,즉 캡(cap)으로 대표되는

스포츠 모자는 90년대 초반 신세대를 중심으로 기본적인 패션소품으로

정착됐다.보다 옛판構?패션의 전통에 연결된 모자는 아직까지 국내에서

널리 착용되지 않는다.그러나 옷차림새의 연출이 모자를 정점으로

확정된다는 패션디자이너들의 일치된 결론처럼 완벽한 스타일에 대한

패션욕구가 강해질수록 모자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

에 없다.

펠트 해트로 대표되는 남성용 모자에 비해 여성용 모자는 그 종류가 꽤

다양하다.대표적으로

샤포.클로슈(cloche).베레(beret).보닛.파나마(panama).터번(turban)등이

애용된다.샤포는 가장 여성적이면서 우아한 느낌

을 주는 모자며 넓은 챙과 우아한 곡선이 특징이다.주로 니트로 짠

종모양의 클로슈는 눈썹아래까지 푹 눌러 써 귀여운 소년의 느낌이

되살아난다.1920년대에 샤넬등 파리의 진보적인 여성들이 즐겨

썼다.베레는 보헤미안적인 분위기나 군복

4스타일의 옷차림에 더욱 잘 어울리며,보닛은 서부소녀의 청순함을

환기한다.여름용 맥고모자인 파나마는 프랑스감독 장 자크 아노의

영화'연인'에서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극단적인 모자로는 천을

머리에 친친 감는 터번이 있다.

최근엔 패션의'성적인 고정관념'이 의문시되면서 남성이 쓰던 모자형태가

여성용으로 응용되고 있다.헌팅캡이나 승마모자등이 대표적이며,심지어

딱딱한 군용 모자가 부드러운 감각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사실 드러나지 않은 모자제조국이다.미국 프로야구 모자의

절반이상을 한국에서 만들어간다는 사실에서 보듯 우리나라의 스포츠모자

생산은 세계적 수준이다.그러나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패션모자의

디자인은 아직 미흡하다. 김형암〈패션평론가〉

<사진설명>

모자 디자이너 그레이엄 스미스의 샤포.1920년대에 디자인된

클로슈.영화'연인'에서 여주인공이 쓰고 나온 맥고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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