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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임기 중 대운하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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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그런 로스레티넌 의원에게 지난 4일 시카고 번호가 찍힌 전화가 걸려왔다.

“오바마입니다.”

“어머, 오바마 목소리와 비슷하네요. 오바마와 당신에게 행운을 빕니다.”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자신의 정치적 비중으로 볼 때 도저히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의 전화라고 믿을 수 없었다. 대선 당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흉내 낸 코미디언에 속은 페일린 공화당 부통령 후보 생각도 났다. 람 이매뉴얼 백악관 비서실장 내정자가 다시 전화를 했지만 역시 끊어버렸다. 하워드 버먼 하원 외교위원장까지 나서서야 겨우 통화가 이뤄졌다.

로스레티넌은 “이제 더 이상 전화할 사람이 없어진 거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오바마는 소통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앨 고어 같은 당내 원로뿐만 아니다. 경쟁 정당의 영향력 없는 의원까지 자신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누구에게나 전화를 하고, 또 만난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8일 런던에서 브라운 영국 총리와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올 들어 열 번이 넘는다. 9월 경제위기가 터진 이후만 따져도 다섯 번이다. 정상회담은 준비하는 데만 최소 몇 개월이 걸린다. 언제, 무슨 주제로, 어디서 만나, 어떤 결과를 발표할지를 모두 구체적으로 정해놓지 않으면 만나지 않는 게 정상 외교의 관례다. 그런 까다롭기 짝이 없는 정상회담의 격식을 이 두 사람은 집어 던져버렸다. 전화도 직접 건다. 사르코지 전화기에는 브라운이 직접 받는 번호가 입력돼 있다. 단축번호를 누르면 비서실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통화한다. 위기의 시대에 소통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셔틀외교’란 이름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공자는 나라를 지키는 요소를 식(食)과 신(信)과 병(兵)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버린다면 먼저 병을 버리라고 했다. 그 다음이 식, 끝까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신이다.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믿음이란 것이다. 믿음이 없어지면 정부는 할 역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신뢰는 소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외교정책을 다시 정비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도 신뢰부터 쌓아야 한다는 걸 오바마는 이미 꿰뚫고 있는 셈이다.

오바마가 로스레티넌 의원에게 전화를 건 4일 새벽 이명박 대통령도 가락시장을 찾았다. 사는 것이 힘들다며 눈물만 흘리는 배추 할머니를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국가 원로들을 초청해 위기 극복을 위한 조언도 들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의 정책에 대한 믿음을 얻었을까.

오바마는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인 5000억~7000억 달러를 ‘신(新)뉴딜’의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에 쏟아붓는다고 한다. 25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일본도 27조 엔(약 2900억 달러), 중국도 SOC 투자 위주로 4조 위안(약 810조원) 이상의 경기부양책을 내놨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지지부진이다. 그나마 ‘뉴딜정책’이라고 내놓은 4대 강 정비사업은 한반도 대운하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예산심의 과정에서 야당은 ‘3조원을 깎는다’ ‘1조원을 깎는다’ 하며 계속 반대했다. 불신 때문이다. 예산이 통과돼도 끝이 아니다.

“4대 강 정비를 해놓고 국민이 잇기를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떠드는데 꼼수가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도대체 이 정부가 뭘 원하는 건지 정부 관료들조차 헷갈린다. 위기를 넘기 위해 어떻게든 일자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인지, 아니면 임기 내 정치적 업적을 쌓기 위해 어떻게든 대운하 공약을 밀어붙여 보자는 속셈인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돼야 할 국민 통합의 에너지를 쓸데없이 낭비할 생각이 아니라면 소모적 논란거리부터 정리하자.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일자리는 얼마나 더 만들 수 있는 건지 자세히 밝히자. 그리고 당당히 선언하라. “내 임기 중에 대운하는 없다”고. 정말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위기를 넘긴 뒤 후임자가 떠맡아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