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低흔들리는한국수출>下.가전제품 가격경쟁력 치명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요즘 도쿄(東京)의 아키하바라(秋葉原)전자상가에는 소니 신형 캠코더를 찾아볼 수 없다.20~30% 할인된 아키하바라 가격으로 사기 위해서는 한달전에 신청해놓고 기다려야 한다.“제 값에도 수요를 댈 수 없는데 굳이 양판점에 싸게 내

놓을 필요가 없다”는게 소니의 대답이다.

엔저(低)가 정착되면서 일본업체들은 해외로 내보냈던 생산품목을 대폭 조정하고 있다.도시바는 동남아와 대만에서 주문자상표 부착생산(OEM)방식으로 공급받던 컴퓨터를 다시 일본 국내에서 생산키로 했다.마쓰시타와 소니도 해외 현지공장의

부품조달 비율을 늘리려던 계획을 수정했다.엔저로 일본내에서 조달하는게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뉴저지주에 위치한 삼성전자 미주판매법인에 비상이 걸렸다.국내와 멕시코에서 생산한 자사제품이 가격경쟁력 면에서도 일본산에 뒤져 판매실적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25인치 삼성 컬러TV의 최근 판매가가 3백달러인데 비해

일본 샤프나 산요제품은 2백70달러다.1년전만 해도 10%안팎 쌌던 것이 이젠 역전됐다.

삼성관계자는“제값받기 노력을 시작한 결과기도 하지만 문제는 엔저로 일본산 제품가격이 대폭 낮춰지는 것”이라며“앞으로가 더 문제”라고 토로한다.동남아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그러다 보니 올들어 2월까지 전자제품 수출은 마이너스곡선을 그

리고 있다.세계적으로 가격폭락 사태를 빚고있는 반도체는 그렇다 쳐도 가전제품까지 마이너스 추세가 가속화되는 결정적 요인은 엔약세다.가전제품은 사실상 남들보다 싸다는,가격경쟁력이 최대의 무기였다.그런데 이번의 엔약세 국면은 과거와 달

리 일본 엔화가 원화보다 더 가파르게 평가절하돼 한국제품의 수출경쟁력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다.

대우전자 이판웅(李判雄)이사는“달러 초강세로 원자재 구입비와 외화표시 채무에 대한 부담은 커지는데 큰 폭의 엔저로 일본제품과의 가격경쟁력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고 말한다.“국내 전자제품은 가뜩이나 마진이 박하다.일본업체들이 휘파람을 불며 엔저에 따른 가격인하를 추진하는데도 국내업체는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는게 삼성 가전부문 관계자의 얘기다.

철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일본 철강연맹의 이마이 다카시(今井敬.신일본제철 회장)회장은 지난달 19일 춘투(春鬪)를 앞둔 시점에도 불구,“당분간 철강에 관한한 낙관적인 전망을 숨길 수 없다”고 밝혔다.

노무라(野村)총합연구소에 따르면 1달러=1백10엔 환율에서 핫코일 생산비용은 일본을 1백으로 할 때 포항제철이 91이다.1달러=1백20엔이라면 이젠 격차가 없다는 얘기다.일본 5대 제철사는 달러당 1엔씩 엔약세가 될 경우 25억엔의 환차익을 얻는다.지난 1월 일본 NKK가 후쿠야마(福山)고로를 재가동한다고 선언한 것은 이런 자신감에 따른 것이다.

철강제품은 주로 반기별 또는 분기별로 이뤄지는데다 대일(對日)공급제품은 엔화로 결제되고 있어 아직까지 큰 영향은 없다는게 국내업계의 얘기다.그러나 엔저가 정착되고 일본업계의 부푼 기대처럼'일본 철강산업의 복권(復權)'이 이뤄질 경

우 그 영향권내에 들 것은 분명하다.또 포철관계자가 지적하듯“철강을 원료로 2차제품을 생산.수출하는 국내업체들이 일본과의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문제다.

양국간 기술격차가 워낙 큰 기계.부품류는 수출보다는 대일 수입쪽이 문제다.산업연구원(KIET) 온기운(溫基云)동향분석실 부연구위원은“가뜩이나 완제품은 물론 핵심부품의 대일 의존도가 높아 그동안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부품국산화 정

책이 이번을 계기로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엔저가 한국 수출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이렇듯 전방위(全方位)에 걸쳐있다.그러나 엔약세는'현실'이며 주어진 과제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하느냐다.바로 일본기업들이 과거 초엔고 시대에 피나는 노력으로 그런 일을 해냈었다.이젠 우리가 할 차례다.〈끝〉

[도쿄=이철호 특파원,이수호.이원호.이승녕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