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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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원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철문과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안에서 걸고 방안의 운동화 발자국을 걸레로 닦았다.발자국은 방 문턱을 넘어와 침대 머리맡으로 이어져 있었다.침대 머리맡에는 자명종 시계와 갓이 씌워진 조명등,전화기밖에 없는데 도둑놈이 왜 이쪽으로 왔을까.원지로서는 발자국이 장롱 쪽으로 나 있지 않은 사실이 여전히 의아하게 여겨지기만 했다.

원지는 발자국을 걸레로 다 훔치고 난 후,침대 머리맡에 앉아 남편 김구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웬일이야? 집에 무슨 일이 있어?”

구환의 목소리 너머로 유선 방송국 사무실 소음들이 우렁우렁 들려왔다.

“잠시 나갔다 들어오니까 주인 아주머니 말이 집에 도둑이 들었대.그 놈들이 고물장수한테 들켜 훔쳐간 것은 없는데,방바닥에 발자국이 나 있고 기분이 이상해.심장도 두근거리고.그놈들이 또 올 것만 같아.그러니 여보,오늘 빨리 들어와.어디 가지 말고.다른 약속 없지?”

“그놈들이라니? 한 놈이 아니란 말이야?”

“두 놈이었대.그러니 더 무섭지.빨리 들어와,응?”

“그래 알았어.오늘 특별한 약속 없으니까.”

원지는 남편과 좀더 통화를 하다가 송수화기를 놓으며 오른편의 경대를 내려다 보았다.아침에 나가면서 빨간 루주를 입술에 바르고 크리넥스 화장지로 매무시를 했던 생각이 났다.친목계 회식 약속 시간 때문에 화장지를 쓰레기통에 버릴 여유도 없이 경대 위에 두고 급히 나간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화장지가 보이지 않았다.머리를 방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여 경대 밑을 살펴보아도 은제 귀이개 하나가 들어가 있는 것이 눈에 띄일 뿐 화장지는 없었다.원지는 귀이개를 경대 밑에서 꺼내어 서랍에 넣어두고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40대의 문턱으로 다가가는 여자의 얼굴에는 간첩처럼 몰래 잠입한 주름살들이 곳곳에서 터를 잡아가고 있었다.저 주름들이 점점 굵어지면서 작은 주름들을 뻗으며 무수한 주름들과 접선을 하겠지.원지는 눈가와 입술 주위에 생기는 주름들이 얼굴의 기존체제를 붕괴시키려는 고정간첩들처럼 여겨졌다.

굳이 따진다면 없어진 것은 화장지 한 장이군.

원지는 경대 왼편에 놓인 크리넥스 통에서 화장지를 다시 꺼내어 입술 루주를 닦았다.건강한 붉은 색소를 잃은 입술이 검푸르죽죽한 가짓빛으로 드러났다.원지는 그렇게 자신의 얼굴에서 세월을 느낄 적마다 아담한 유치원을 하나 경영하고 싶은 소박한 꿈마저 바래가는 듯하여 은근히 초조해졌다.그 꿈을 위해 저축을 하고 있는 은행 통장에 좀도둑의 손이 닿을 뻔했던 일을 생각하니 전신이 오싹해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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