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기 싫어서 …‘어린 왕자’문세영, 전설 향해 말 달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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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경마장이 들썩인다. 걸출한 스타의 탄생 덕분이다. 데뷔 7년차의 기수 문세영이 주인공이다. 28세의 이 사나이는 주말마다 우승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문세영이 달린다. 올해만 벌써 123승. 국내 경마계의 지존 박태종의 기록도 갈아치웠다. 통산 347승을 거둔 문세영은 내년 시즌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을 계획이다. 사진은 말 등에 올라탄 문세영이 힘차게 질주하는 모습. [KRA 제공]


문세영은 지난 6일 경기도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제2, 7, 9경주에서 우승한 데 이어 11경주에서도 1위로 골인하며 시즌 통산 최다승 기록(121승)을 세웠다. 기세를 몰아 다음날 열린 경주에서도 2승을 추가하며 시즌 123승을 기록했다. 이전까지 시즌 최다승 기록은 ‘기록 제조기’로 불리는 박태종(43) 기수가 세웠던 120승. 앞으로 3주(경마일 기준 6일)의 경마가 더 남았으니 이런 추세라면 문세영은 시즌 130승도 바라볼 만하다. 상승세가 워낙 가파르다 보니 요즘 경마장을 찾은 경마 애호가들은 ‘문세영’의 이름 석자만 보고 베팅을 할 정도다.

◆기록 제조기=과천 경마장의 기록 제조기 하면 통산 1445승을 거둔 박태종이 첫 손가락에 꼽혔다. 그러나 올 들어 문세영은 이런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는 올해 677차례나 말에 올랐다. 그 가운데 123승을 거둔 것이다. 677차례나 말에 오른 건 시즌 최다 기승 기록. 2006년 박태종이 세웠던 시즌 최다 기승(633회) 기록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박태종은 기승술이 무르익은 40대 초반에 최다 기승 기록을 세운 반면 문세영은 20대 중반의 나이에 시즌 최다승과 함께 최다 기승 기록도 갈아치웠다. 야구로 말하면 투수 장명부의 최다승(30승·1983년)이나 이승엽의 최다 홈런(56개·2003년) 기록을 깨뜨린 것과 비견될 만하다. 한국 경마사에 획을 그은 대기록으로 평가된다.

“전반기 65승을 했을 때 주위에서는 시즌 최다승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최다 기승 기록이 더 욕심났습니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기수생활을 시작하려 했던 2007년 1월 첫 경기에서 큰 부상을 당하면서 쓰디쓴 좌절을 맛봤기 때문에 다치지 말고 되도록 많은 말을 타보자는 생각이었죠. 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집중하니까 그 힘든 기록을 깰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다승 기록을 깬 6일 문세영은 대선배인 박태종 기수를 찾아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선배님이 너무 훌륭한 기록을 세워놔 깨느라고 힘들었습니다.”

냉정한 프로 세계에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더 예의에 어긋날 것 같았다는 게 문세영의 설명이다. ‘과천벌의 살아 있는 전설’ 박태종은 트레이드마크인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수고했다”고 축하해 줬다.

◆어린 왕자=경남 밀양 밀성고 3학년까지 태권도를 했던 그는 수능시험을 본 뒤 선생님이 가져온 ‘기수 공고’를 보고 2001년 기수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고는 2004년 10월 입대하기 전까지 최단기간 수습기수 해제, 최단기간 100승 돌파 등 각종 기록을 깨며 경마팬들에게 다가섰다. 박태종 독주 체제가 굳어가던 당시 문세영의 등장은 경마장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여성이 주축이 된 팬들은 그에게 ‘어린 왕자’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기수치고는 큰 1m63㎝의 키에 깔끔한 외모로 적잖은 여성팬을 확보했다.


잘나가던 그는 2004년 돌연 자원 입대를 결정한다. 병역 의무를 빨리 마치고 경마에만 집중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입대하기 전날까지 경주에 나갔고, 2006년 11월 제대하자마자 곧바로 경주에 나설 정도로 그는 말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러나 문세영은 제대 이후 큰 부상을 당해 6개월 이상 말에 오르지 못했다. 2년을 기다려 막 날개를 펼 즈음 왼쪽 쇄골과 늑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문세영은 “지옥 같은 재활훈련을 하면서 ‘말 타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힘들었던 경험이 지금도 1주에 20회 이상 기승하는 강행군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승부욕과 과감성=전문가들이 그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은 승부욕이다. 여기에 코너를 돌 때의 추진력, 시속 60㎞의 아슬아슬한 승부 와중에도 마필 틈새를 파고들 줄 아는 과감성과 시야 등도 그가 승승장구하는 비결 가운데 하나다.

“고등학교 때부터 승부욕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무슨 운동을 해도 지고는 못 살았고, 그게 아니라면 다른 것에서라도 이겨야 직성이 풀렸거든요. 지금도 맞대결해 져본 말이나 기수한테는 꼭 설욕을 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가 풀릴 날이 없죠.”

또 하나 빼놓을 없는 문세영의 장점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특이체질이다. 적잖은 기수가 체중 감량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기수면허를 반납할 정도지만 그는 좋아하는 음식을 다 먹고 다녀도 10년째 같은 체중(48㎏)이다.

전문가들은 박태종이 ‘물 흐르는 듯한 스타일’이라면 문세영은 ‘공격적인 말몰이’가 특징이라고 말한다. 박태종은 추입마(막판 추월에 강한 마필)가 일찍 치고 나가려 해도 조급해하지 않고 참는 스타일이지만 문세영은 다르다. 지기 싫어하는 고집이 경주에 그대로 묻어난다. 최근들어서는 경주를 보는 시야, 코너워크가 더욱 트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년에 1년여간 교제해 온 여자친구와 결혼할 예정이다.

박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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