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국정>5. 로비만능의 기업 병폐-부패기업 조장 관공서도 한몫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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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보만 문제가 아니다.정태수(鄭泰守)총회장이 95년부터 자금사정이 나빠지면서 로비강도를 높이자 어떤 은행장은 이를 커미션을 챙기는 기회로 활용했다.”

재정경제원에 근무하다 다른 경제부처로 옮긴 한 관료는“그 은행장은 다른 은행에 중개역할까지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30대 그룹안에 드는 한 기업의 오너는 최근 모정부기관 인사와 만난 뒤 무안을 당했다.그 정부 인사의 부하직원이 친구인 오너의 참모한테 전화를 걸어“돈을 갖고 오라는 것은 아니고”라며“선물 하나쯤 들고오면 모양이 좋지 않았겠느냐”

고 말했던 것.

“세금.공장신축허가에서부터 은행.경찰.소방서까지 어느 하나 뇌물없이 해결되는 일이 없었다.”

재이손산업 이영수(李永守)사장이 최근 기업인 조찬회에서“1억3천만원짜리 공장을 짓는데 3천만원이 뇌물로 들어갔다”며 폭로한 우리사회의 부패스토리는 요즘 기업인 사이에 심금을 울리는 화제가 되고 있다.

직접적인 뇌물이 아니라 성금.부담금같은 준조세도 기업의 발목을 잡는 사슬이다.

중기청의 지난해 전국 6백개 중소기업대상 조사에 따르면 95년기준 업체당 평균 6천2백만원의 준조세를 물어야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87년 4천만원,90년 4천5백만원,93년 5천6백만원등 기업의 준조세 부담은 계속 눈덩이처럼 증가하는 추세다.

10대 그룹에 드는 한 기업의 톱경영인은“사업차 외부인을 만날 때는 외제차를 탄다”며“호사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래야 상대방이 응대해주기 때문”이라고 사회풍조를 비꼬았다.

전경련 관계자는“정부가 산업정책에 간여하면서 금융자원을 인위적으로 배분하고 주인없는 은행이 집단 부실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청와대수석과 공정위위원장의 장관급 격상,해양부.중기청 신설등 문민초기의'작은 정부'철학이 실종됐다”며“차제에 깨끗한 정치,주인있는 은행,작은 정부의 3박자 개혁 청사진이 제시되지 못하면 제2의 한보사태를 못막는다”고

단언했다.

이 점에서 한보사건과 관련된 서울은행 케이스는 참신한 청량제가 될 만하다.

93년 7월 당시 서울은행은 한보의 주거래은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보측에서 시설자금 1천여억원의 대출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한보의 재무구조.사업성등으로 볼 때 무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한보담당이었던 서우구(徐又九.52)여신상담역은 끈질긴 한보측 로비에 시달렸으나 결국 물리쳤다.그는 지난해초 은행서 명예퇴직했고,서울은행은 최근 검찰수사는 물론 은행감독원의 특검에서도 무풍지대로 남을 수 있었다.

전경련 부회장을 지낸 재계 원로 김입삼(金立三.74)씨는“한보사건의 근본적 원인은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의 부재(不在)”라고 지적한다.그는“선진국이란 다름아니라 고위층이든 실무자든 각자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예스냐,노냐를 분명히 가리

고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풍토가 정립된 사회”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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