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다방의 세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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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4후퇴 직후 부산에서 설흔살 안팎의 짧은 삶을 청산한 정운삼(鄭雲三)과 전봉래(全鳳來)두 시인의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다.다방에서 음독자살했다는 점이다.鄭시인은 실연(失戀)때문이었고,全시인은 염세(厭世)때문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鄭시인은'밀다원(密茶苑)'다방,全시인은'스타'다방의 구석자리에서 마치 벽화(壁畵)처럼 앉은채 죽어갔다.

'왜 하필이면 다방을 죽음의 장소로 택했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법하지만 피난시절 부산의 다방들은 대폿집과 함께 모든 예술인들의 안식처요 꿈의 산실이었다.후에 김동리(金東里)는'밀다원시대'라는 작품을 발표해 다방을 중심으로 한'피난문

단'의 애환을 리얼하게 전했다.다방 문앞에 서기만 하면 벌써 문학.미술.음악의 열기가 꿀벌처럼 잉잉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고,공초(空超)오상순(吳相淳)의 다방철학과 다방포교가 시작된 것도 그 시절부터였다.대개의 작품들은 다방에서

구상돼 만들어졌고,차값을 내주는 사람은'구세주'로 불렸다는 것이다.

6.25중 다방이 없었더라면 휴전까지의 전쟁기간은 예술의 공백기가 됐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그 무렵의 다방이야말로'문화다방'의 이미지에 걸맞은 것이었다.휴전 이후 오랫동안 다방이 전시회.문학의 밤.출판기념회.추모회 등 문화현장

의 역할을 해낸 것도 피난지 다방의 영향탓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같은 문화적 이미지가 엷어지고'상업다방'의 면모를 보이면서 다방은 세태의 일그러진 모습들을 반영하는 장소로 탈바꿈했다.불량배나 범죄자들의 온상역할을 하는가 하면,불경기일 때는 고급실업자들의 시간때우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특히 70년대 이후는 농촌에까지 다방이 급증했고,중소도시엔 이른바'티켓 다방'이 크게 성행해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다방이라는 용어는 본래 고려시대부터 사용됐지만 다도(茶道)문화와 관련된 것이었으니 지금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한데 다방업중앙회는 앞으로'다방'대신'휴게실'이란 명칭을 사용토록 적극 권장할 계획이라 한다.카페나 레스토랑에 밀리고

있는데다'고리타분한 곳'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아직도'문화다방'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계층에는 서운함도 없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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