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시대>7.고개 든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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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주부 강길순(48.서울서대문구아현동)씨는 얼마전 한 친척집 결혼식에서 본 신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양가 어머니들이 입장할 순서에 부모가 같이 입장하더니 곧이어 신랑.신부가 나란히 식장에 들어서는 것이었다.화사하게 미소지으며

아버지가 아닌 신랑의 손을 잡고 들어서는 신부의 모습이 너무 생소했다.하얀 웨딩드레스 끝자락만 보며 고개 숙인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입장했던 25년전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 만남부터 결혼생활에 이르는'결혼'이란 일련의 의식.그중에서도 끝까지 보수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결혼식에서까지 신부들의'반란'이 일어나고 있다.시댁 친척들에게 흠이라도 잡힐까봐 대기실에서도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앉아있던 신부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식장에 신부가 신랑과 나란히 입장하는 것도 이제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지난해 11월말 결혼한 원유순(27.여.한국방송통신대 도서관 사서)씨는 결혼식 때 신랑.신부가 나란히 입장한 것은 물론 폐백도 양가 친척들에

게 모두 드렸다.

결혼의 주체는 분명히 남녀 모두지만 청혼에서부터 결혼식.결혼생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남성 주도적이었던 것이 사실.그러나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고 사회.경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이제 '결혼'이란 의식에서도 여성들은 주도적 위치로

나서고 있다.

우선 여성이 결혼상대자인 남성을 먼저'고르는'경우가 보편화되고 있다.맞선을 본 여성이 남성의 전화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대는 지났다.맘에 들면 여성이 먼저 적극적으로 연락한다.미팅정보회사 선우이벤트의 이웅진(李雄鎭)실장은

“5년전만 해도 여성의 20%만이 본인의 의사로 회원가입 신청을 했지만 지금은 70%이상이 스스로 짝을 찾아 이곳에 온다”고 말한다.PC통신망에 얼굴사진을 게재하는 것에도 여성회원 대부분 거리낌없어 한다고.

최근 남편과 사별했거나 이혼한 여성들이 재혼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자식 하나만을 믿고 몇십년을 수절과부로 살았다는 얘기는 어머니대의 얘기일 뿐이다.남녀재혼 형태를 보면 남성이 초혼,여성이 재

혼인 경우도 적지 않다.80년에만 해도 총 재혼건수의 15.3%이던 것이 94년엔 24.6%로 전년대비 61% 증가를 보였다.

또한 결혼 후에도 젊은 여성들은 '지아비'에게 순종만 하는 아내이기를 거부한다.전반적인 사회인식의 변화,맞벌이 여성의 증가도 한 원인이지만 결혼연령 형태의 변화 요인 또한 무시할 수 없다.동갑끼리 결혼하거나 여성이 연상인 경우가

많아지면서 동등한 관계의 부부가 늘고 있는 것.평균 초혼연령인 26~28세 남성의 경우 동갑 또는 연상의 여성과 결혼한 경우가 85년 11.4%에서 94년엔 14.9%로 늘었다.하지만 단순히 수치가 늘었다고 관계가 달라졌다고 보는건

아니다.신부측이 연상인 경우가 예전엔 대부분 집안끼리의 중매를 통한 결혼이었던데 비해 요즘엔 거의가 연애결혼이다보니 결혼 후 모습에도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본인의 나이가 더 많아도 꼬박꼬박 남편을 윗사람처럼'모시던'과거의 신부들과

달리 요즘 연상의 아내들은 남편과 대놓고 친구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에 대한 여성들의 주체적인 의식변화는 역설적으로 이혼 제기율에도 나타난다.여성이 먼저 제기하는 이혼소송이 많아진지 벌써 10여년.95년만 해도 재판이혼 청구건수 2만3천6백92건중 여성이 제기한 것이 1만2천7백69건으로 53

.9%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두고 일반화하기는 힘들다는 견해도 있다.손승영(孫承暎.연세대강사.사회학)박사는“과거에 비해 여성들의 결혼상대자 선택권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최종동의.결정권은 아직도 부모에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역시 최근의 변화가 갖는 긍정적인 면에는 동의한다.“여성들도 결혼에서 책임감있는 주체적 의지를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결국 결혼이 우리나라같은 가족주의 문화에서 갖는 중요성을 생각해볼 때 아직은 많은 문화적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지만 이미 시작된'신부들의 반란'은 앞으로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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