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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몰기 박헌영제거가 대표적-황장엽비서도 비슷할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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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53년의'박헌영.이승엽사건'은 북한 권력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50년대 최대의 사건이었다.특히 이 사건은 북한의 2인자였던 박헌영(朴憲永.당시 부수상)과 이승엽(李承燁.사법상).이강국(李康國.무역상)등 월북한 남로당계 최고간부

들이 연루됐다는 점에서 북한뿐 아니라 남한내에 잔존해 있던 좌익세력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사건은 52년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당의 조직적.사상적 강화를 지적하면서 표면화됐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종파분자'들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적의 정탐배로 되고 만다”고 지적했다.이때까지만 해도 종파분자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불분명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채안된 53년3월 박헌영.이승엽등 과거 남쪽에서 활동한 남로당계 핵심인사 13명이'반혁명 음모와 미제(美帝)의 간첩'혐의로 비밀리에 체포됐다.뒤이어 대남 연락부와 유격지도처에 있던 남로당출신 간부들이 줄줄이 연행

됐다.

북한은 이 사실을 극비에 부친채 노동당내의 남로당출신들을 조사했다.

수많은 남쪽출신 간부들이 수차례'뼈를 깎고 간을 녹인다'는 당성검토를 받았다.

마침내 이승엽등 12명은 8월초 ①미 제국주의를 위한 간첩행위 ②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행위 ③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 행위등의 죄목으로 비밀재판에 회부됐다.이들은 대부분 사형을 선고받았다.박헌영만 소련과 남한내의 좌익세력을

의식해 2년이 지난 55년12월 비밀재판에서 같은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56년말 처형됐다.

북한이 공개한 재판기록에는 박헌영이 모든 범죄사실을 순순히 시인한 것으로 돼있지만,고문에 의해 사건자체가 날조됐다는게 귀순자들과 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朴의 처형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됐다.그러나 이 사건으로 북한의 대남공작은 한동안 마비상태에 빠졌으며,남쪽출신들이'남조선의 간첩'이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속에서 지내야 했다.

황장엽 망명사건을 44년전의'朴.李사건'과 단순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남북에 미칠 정치적 파장은 더 클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창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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