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열며>감자나 좀 함께 팔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어느 교우가“신부님,개구리 다리 안주해서 소주 한잔 합시다” 하기에 나갔다 들어오니 현관 앞에 웬 사과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어느 교우가 갖다 놓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요즘 사과 상자에 사과가 아니라 돈이 많이 들어 있다는데 이것이 사과인가,돈인가 하여 발 끝으로 툭 쳐보며 생각했다.사과 상자를 보며 돈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속물은 속물이구나,신문.TV 보도를 보고 나도 모르게 그런 모습을 배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돈 싫다고 마다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마는 나라 꼴이 돈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고 보니 나는 깃털일뿐 실세가 아니라는 등,또 나는 떡값일뿐 뇌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등 변명이 난무한다.2~3일이나,늦어도 2~3년이면 대통령도 무엇을 먹었으면 다 들통날텐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나는 한푼도 안 받았다”는 줄줄이 합창만 노래하며 반성은 커녕 오히려 다른 이의 가슴만 치면서 탓을 뒤집어 씌우고 있다.

소위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라면 나같은 무식한 국민이 보고도 배우게끔 먼저 자기 가슴을 치며 용서를 빌줄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게 아닌가 보다.또 몇푼 받았다고 정직하게 말하면 동정이라도 받을텐데 하도 요란스럽게“나는 한푼도 안 받았다”고 결백을 호소하며 떠들어대다가도 들통이 나니,시골에 사는 나같은 사람도 “얼마나 받았길래 그래”“어디 받아먹은 사람이 하나 둘이겠어”하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10년 전에 재야 운동가 한분이 국회의원이 된다고 하기에“선생님,그 똥물 속에는 왜 들어가려고 하십니까” 하고 만류했던 기억이 있다.사실 이 나라의 정치인이 보여준 덕행을 보고 본받은 국민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있다 해봤자 극소수일 것이고 대부분은 그들로부터 뒤집어 씌우기,흠집내기,거짓말 하기,오리발 내밀기만을 배웠을 것이다.바라건대 대오각성하는 마음으로 금배지를 내려놓고 지난 가을 무장공비 사건으로 출하시기를 놓쳐 판로를 잃어버리고 시름에 잠겨있는 강원도 농사꾼들을 위해 나와 함께 감자나 좀 팔자고 제안한다면 너무 버릇없는 주문일까.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문제는 자신이 욕심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거꾸로 욕심이 자신을 다스리면 개인도 가정도 국가사회도 결국

끝없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링컨이 주의회 의원으로 출마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소속당은 선거자금으로 쓰라고 2백달러를 보내왔다.링컨은 당선후

선거자금중 1백99달러25센트를 당 본부로 되돌려 보내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선거 연설회장 비용은 내가 갚았고,여러 유세장을 다니는

데는 말을 탔기 때문에 비용이 들지 않았소.다만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목이 마르다고 해 사이다를 한 잔 사준 것이 75센트가 들었소.”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 제자인 플라톤에게 했다는 말이 기억난다.“나는

이제 죽음을 향해 아무 거리낌 없이 간다.그러나 에스크래피아스에게 닭

한마리를 빌리고 갚지 못했다.빚을 남기고 가니 부디 잊지 말고

갚아주게”라는 말이다.

국민의 세금을 마구 쓰고도 모자라 수조원의 빚을 국민에게 남기고도

당당한 이들과는 너무 거리가 먼 것 같다.욕심을 다스려 아무리 뒤를 파

보아도 깨끗한,그래서 링컨처럼 75센트의 명세서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그립다.

깃털이니 실세니 떡값이니 뇌물이니 말하기 전에,나는 한 푼도 안 받은

깨끗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구린 돈 몇 상자쯤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먼저 진실 앞에 자신의 가슴을 열자.그리고 사과

상자를 보고 돈인가 생각했던 속물 냄새까지 토해내며 가슴을 치고 용서를

청하자.그래야 성서의 요엘 예언자가 말씀하셨듯 옷만 찢지 않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할 수 있고 욕심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김영진 정선 본당신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