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기행>파리 퐁피두 센터-해방을 꿈꾸는 예술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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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퐁피두 센터의.스튜디오 5'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생애와 예술에 관한 기록 필름을 보았다.그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작품들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마치 춤추는듯 약간 과장된,우아한 몸놀림이 인상적이다. 호모라서 그런가.인터뷰 도중 계속 술을 마시며 상대에게도 잔을 권하는 그는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같다.그만큼 자유롭다는 표시일 것이다.간혹 대화 도중 느닷없이 질문을 던져 기자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한다.가령 이런 식이다. “나는 여자보다도 남자를 좋아한다.당신은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는가.” 베이컨의 생애는 작품만큼이나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다.1909년 아일랜드에서 가난한 말 조련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한다.16세때 아버지와의 불화로집을 뛰쳐나온 뒤 베를린과 파리.런던을 전전하며 생계를 위해 요리사.가구 디자이너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28년 파리에서 피카소의 전시회를 본 뒤부터다. 10여년의 외로운 작업 끝에 1944년께 그는 돌연 입체파의 영향을 벗어나 자기 스타일을 확립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우리 시대의 일상 속에 잠재된 야만과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인간이기 이전에 서로 먹고 먹히는 살덩 이라는것을 보여준 베이컨.그는 이미 한물 간 퇴물로 취급되던 리얼리즘 회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며 일약 세계적인 화가로 떠올랐다. 그는 항상 소문을 몰고 다녔다.개인전을 열 때마다 애인들이 한사람씩 죽은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불길하다.1962년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서 최초의 회고전이 개최됐을 때는피터 레시가,그리고 1971년 파리의 그랑팔레 전시중 에는 조르주 다이어가 세상을 떠났다.도덕적 금기를 깨는 베이컨의 사생활 또한 세인들의 입방아에 올랐다.마약.알콜중독.동성연애.도박….그러나 뜬 구름처럼 사회의 변방을 떠돌다가도 그는 늘 다시자신의 비좁은 작업실로 돌아왔다. 외양간을 개조해 만든 그의 런던 스튜디오를 보았다.세상에….더이상 어질러질 수 없을 정도로 어질러진 방,그건 화가의 아틀리에라기보다 쓰레기 창고에 가까웠다.이런 완벽한 무질서가 있을수 있나.나도 한국에서 더럽기로 악명높은 화가들 의 작업실을 어지간히 봐 왔지만 이처럼 발 디딜 틈은커녕 손 뻗칠 공간도 없이 난잡한 방은 처음이다.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작업실이리라.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억압기제로부터의 해방을 꿈꾸고 자신의 인생과 예술을.저질렀던'베이컨,그처럼 몸과 영혼이 자유로웠던 사람에겐 타인의 시선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작품에쏟아지는 찬사와 비난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1 992년 세상을 뜨기 직전 이뤄진 마지막 대담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그것은 그들의 문제입니다.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나는 내 자신을 위해 그립니다.” 〈시인〉 피터 비어드의 1975년 사진작품.프란시스 베이컨의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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