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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보상기금 신설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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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우리는 환란 이후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했다. 그러나 이제는 기업의 주요 이해관계자에 투자자와 경영자뿐만 아니라 종업원까지 포함되는 광의의 기업지배구조인 기업구조의 개선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기업구조에는 미국 모델과 유럽 모델이 있다. 하버드대 법대의 로(Roe) 교수에 따르면 두 모델 간의 여러 가지 차이는 사회평화, 특히 노사평화를 달성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총선 결과로 나타난 정치환경의 변화는 두 모델의 차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국민의 지혜로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 정치철학이 기업구조 차이 불러

활발한 생산활동의 필요조건은 노사평화다. 정치철학이 다른 미국과 유럽은 노사평화를 달성하는 방법에서도 다르다.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지배적이고, 미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지배적이다. 정치철학의 차이는 소유.경영.고용을 축으로 하는 기업구조에 뚜렷한 차이를 가져오고, 제품시장의 경쟁구조와 증권시장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유럽에서는 주주.경영자.종업원 중에서 종업원의 이해를 가장 중시함으로써 노사평화를 달성한다. 예컨대 독일에서는 종업원의 경영참여를 통해 종업원의 이해를 보호한다. 미국에서는 주주의 이해를 가장 중시하지만, 지배적인 집단의 등장을 억제하고, 공적 사회안전망과 사적 연금제도 및 종업원의 이익공유 제도를 통해 노사평화를 유지한다.

미국과 독일을 자세히 비교함으로써 정치가 기업구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자. 우선 독일의 경우 종업원을 우선시하므로 노동유연성이 낮다. 실업률은 10%를 넘는다. 종업원 대표가 절반을 차지하는 감독이사회는 활발한 정보교환과 토론의 부재로 그 기능이 취약하다. 경영자와 주주의 이해를 일치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발전하지 못했다. 경영자 보상이 약하고, 적대적 인수.합병이 어려우며, 투명성도 낮다. 결국 경영자는 확대지향.위험회피.구조조정 기피의 성향을 보인다. 경영자의 대리인 비용이 높아 소유분산 체제로는 효율성을 높일 수 없어 대주주가 존재하는 소유집중 체제를 갖고 있다. 그 결과 공개 기업의 수가 적고, 증권시장의 발전도 미약하다. 빈번한 구조조정을 불가피하게 하는 시장경쟁이 억제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기업구조의 측면에서 미국은 독일과 정반대의 경향을 보인다.

1980년대까지는 어느 모델이 더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효율만 고려하면 미국 모델이 더 우월하지만, 유럽 국민은 효율보다는 장기적인 사회평화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 통합과 세계화의 진전으로 치열한 경쟁에 직면하게 된 유럽 각국들은 싫고 느리지만 미국 모델을 모방하고 있다.

한국은 어느 모델을 선택해야 하는가. 총선 이후 유럽 모델에 대한 동경심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 모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는 환란 이후 이미 미국식 지배구조 장치를 다수 도입했다. 둘째, 한국 경제는 대외의존도가 지극히 높기 때문에 유연한 조정이 가능한 미국의 시장경제 모델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셋째, 한국이 육성해야 하는 신성장 동력산업의 발전에는 미국 모델이 절대적 우위를 갖고 있다.

*** 퇴직보상기금 등 안전망 확충을

우리가 미국 모델을 선택하려면 노사평화 방안 또한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우선 사회안전망을 획기적으로 확충하고 공적연금을 보완하는 기업연금제도를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유연성과 이익공유제를 동시에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종업원과의 이익공유를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가칭 퇴직보상기금의 설치를 제안한다. 퇴직보상기금은 경기가 좋을 때 원래 주주의 몫인 순이익의 일부를 사외에 설치된 기금에 적립했다가 경기가 나빠 인력조정이 필요할 때 퇴직자에게 분배하는 제도다. 물론 적립금에 대한 세제혜택도 필요할 것이다.

노사평화 없이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구조상 종업원의 경영 참여보다는 분배 참여를 지향해야 한다. 최근 정치권력의 축이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선호하는 진보적인 그룹으로 이동했지만 우리가 생존하려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모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박상용 연세대 교수 증권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