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 먹고 자란 ‘얼굴 없는 우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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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01면

지난 21일 저녁, 서울 여의도의 한 송년 모임. 얼굴 없는 사이버 논객 ‘미네르바’와 그가 환투기 세력에 명명한 ‘노란 토끼’가 내내 화제가 됐다. 미네르바는 최근 수개월간 경제 위기를 예측하고 정부의 잘못된 처방을 비판하며 일약 ‘사이버 교주’로 떠올랐다. 직장인은 물론 주부 사이에서까지 ‘미네르바를 모르면 왕따당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한마디에 술렁대는 대한민국

무엇이 이 익명의 선동가를 세간의 영웅으로 키웠을까. 우선 몇몇 경제현상을 맞춘 예측력이다. 독일 유력 경제지 한델스브라트는 20일자 ‘한국 증시가 예언자 앞에 떨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네르바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을 예고했고 원화 가치의 가파른 하락세도 정확히 예측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미네르바 현상의 토양이 됐다고 지적했다. 일부 네티즌은 “미네르바 현상을 낳은 것은 바로 현 정부의 무능”이라고 주장한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나미 박사는 “정치 불안, 경제 위기 상황이 닥치면 묵시록이나 계시록이 먹히는 세기말 증후군이 나타난다”며 “정신적 공황에 빠진 사람들의 심리를 익명의 거침없는 주장이 파고든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정부의 과민 대응도 미네르바를 키웠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지난 3일 국회에서 “(인터넷 괴담이) 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한다면 수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매일경제는 지난 12일 정보당국이 신상을 파악했다고 보도했다. 미네르바는 이 보도 하루 뒤 “국가가 침묵을 명령했기 때문에 입 닥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네티즌은 ‘왕의 귀환’을 부르짖었다. 정부 관계자는 “촛불집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 정치세력의 선동장이 된 것처럼 미네르바 현상도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화하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청와대 임삼진 시민사회비서관은 “정부는 미네르바의 실체에 대해 파악하려 한 적도 없고 따라서 침묵을 명령한 적도, 탄압한 적도 없다. 일부의 출국금지설은 언어도단이다”며 “미네르바는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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