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대출 왜 안 풀리나 했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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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수도권 공단의 한 시중은행 지점장실. 지점장과 중소기업 사장이 대출 상담을 하고 있다.

“1억원이면 됩니다. 납품 대금이 지연돼서 그러니 6개월만 빌립시다.”

“대출 부실이 생기면 제가 다 뒤집어 써야 하는데…. 그러지 말고 저 좀 봐주세요.”

서로 “살려 달라”는 애원만 오간 채 상담은 5분여 만에 끝났다. 지점장은 “곧 연말 고과가 시작된다”며 “반기 또는 1년 단위로 실적을 평가하는 상황에선 누가 뭐라든 내 몸은 내가 지킬 수밖에 없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은행들에 대출을 하라고 독려하고, 한국은행이 연일 자금시장에 돈을 풀고 있지만 꽁꽁 얼어붙은 대출 창구는 풀리지 않고 있다. 실무자들이 움직이질 않기 때문이다. 인사 고과철에는 더욱 그렇다. 부실이 나면 결국은 내가 뒤집어 쓴다, 재임 중에는 어떻게든 경영지표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 지점장에서 경영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단기 평가를 의식해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은행의 단기평가 제도를 최근의 대출경색은 물론 은행 경영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연세대 주인기(경영학과) 교수는 “은행 경영이 극단적인 단기평가에 좌우되고 있어 금융당국이 큰소리 치는 것과 달리 일선 창구는 열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대표도 “모든 것을 단기 실적으로 평가하고, 부실책임을 과도하게 지우는 현행 평가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말로만 대출을 독려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외환위기의 악몽 때문인지 금융인들 모두가 ‘위험 회피자’가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현장에서도 이를 인정한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본점은 가급적 기업에 대출을 연장해 주라고 하지만 지점장 입장에선 그렇게 하기 힘들다”며 “지점장이라고 해 봤자 길어야 2~3년 하는데 부실이 쌓이면 앞날이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 우리은행의 경우 지난해에만 두 차례에 걸쳐 전 지점장의 절반인 460명을 교체한 데 이어 올 상반기에 또 120명을 바꿨다. 은행장이 바뀌거나 경제상황이 변할 때마다 지점장은 ‘파리 목숨’이다. 임원들도 마찬가지 신세다. 모 은행 부행장은 지난해 내내 카드 부실을 줄이다가 외형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올 초 퇴임해야 했다. 다른 은행의 임원은 취임 이후 기대한 만큼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선임된 지 불과 9개월 만에 낙마했다. 그러다 보니 위아래를 막론하고 책임질 만한 일은 하지 말거나 미루려는 ‘보신풍조’가 은행 전체에 퍼진 것이다.

전광우 금융위원장도 은행들의 단기평가와 그에 따른 보상제도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나섰다. 그는 1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한국시장 투자자 설명회를 한 후 “은행들이 지난 몇 년간 장사 쉽게 하면서 보상을 많이 받은 데 대한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스톡옵션도 중장기적인 경영효과가 나타날 때 보상하는 게 맞다”며 “성과보상 시스템을 개선하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단기적으로만 이뤄지던 평가와 보상 체계의 문제점을 감독 당국의 수장이 처음 인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금융위와 금융감독원은 구체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주인기 교수는 “금융당국과 은행이 함께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 점검해 서둘러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권에선 지점장의 면책권을 확대하고, 임원의 스톡옵션을 장기평가에 근거해 부여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기업은행은 20일부터 지점장 추천으로 본점에서 대출 한도를 승인해줄 경우 나중에 그 기업이 부실화하더라도 지점장들을 문책하지 않기로 했다. 이경렬 부행장은 “기업들이 흑자 도산하지 않도록 신속히 지원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김준현·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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