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무대를 박차고 하늘로 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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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무대 위에서의 힘찬 도약도 멋지지만 활주로에서 이륙하는 순간이 더 짜릿해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를 누비던 발레리노가 항공기 조종사가 됐다. 2년 간의 조종사 교육을 마치고 올 하반기에 아시아나 항공 부기장이 되는 장원혁(張元赫.31)씨. 그는 최신 기종인 A321 에어버스를 조종하게 된다. 張씨의 원래 꿈은 발레리노로 대성하는 것이었다. 발레를 시작한 것은 고교 1학년 때. 184cm의 키에 72kg의 몸무게였던 그는 무용수로서 완벽한 신체 조건을 갖췄다. 3년 동안 열심히 춤을 춘 덕에 그는 1994년 한양대 무용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입학 후 매일 밤 늦게까지 연습실에서 춤에 몰입했다. 공연이 끝나면 또 새로운 공연 준비. 연습실과 공연장을 오가는 일상 속에 張씨는 어느 날 더 이상 날아오르지 못하고 벽에 부닥쳤다.

"아무리 춤을 춰도 저를 100%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한계를 느낀 거죠. 춤에서 마음이 멀어지자 몸도 움츠러들더군요." 무용수를 꿈꾸는 이들이 흔히 겪는 슬럼프였지만 張씨의 방황은 특히 심했다. 주요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군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張씨는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자원 입대했다. 도피처로 군대를 택한 것이다. 무용수에게는 치명적인 공백을 스스로 선택했다.

"제대를 앞둔 어느 날 우연히 일반인도 조종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내 길은 이거다'하는 확신이 들더군요."

복학한 뒤 98년 예술의전당 무대에 섰다. 그러나 몸은 무대 위를 날아도 마음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대학 측이 전액 장학금을 제시하며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지만 조종사가 되려는 그의 꿈을 흔들지 못했다.

그는 2002년 3월 100대 1의 경쟁을 헤치고 아시아나항공에 조종훈련생 23기로 입사했다. 적성시험.영어시험.신체검사.면접 등 열두 차례에 걸친 관문을 뚫은 것이다. '무용을 그만둔 것이 아깝지 않으냐'는 질문도 수없이 받았다.

"춤을 얼마나 잘 추느냐는 몸의 균형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조종 훈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무용을 배우며 익힌 균형 감각과 섬세함이 도움이 됐습니다. 철저한 연습과 준비된 몸놀림이 하나의 동작을 만들어내듯 항공기도 치밀한 준비와 훈련으로 누구보다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무용을 통해 기른 체력도 큰 도움이 됐다. 비행기의 원리와 비행시스템을 설명한 100여권의 원서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씨름했다.

"아직도 통과해야 할 관문이 많습니다. 제가 앞으로 몰아야 할 A321 에어버스 시뮬레이션 테스트도 있습니다. 그래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불과 몇년 만에 전혀 다른 출발점에 섰지만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기쁘기만 합니다."

글=김은하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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