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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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준우는 자기 나름대로 브이 세대론을 두 페이지 정도에 걸쳐 펼치고 있었다.일종의 총론만을 열거한 셈인데 그 요지는 브이 세대에게는 이제 가정도 필요없고 학교도 필요없다는 것이었다.논리 전개나 표현이 거칠기 그지없었지만 무엇을 주장 하려고 하는지는 분명히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준우는 자신의 가출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세대론에 기초한 신념 내지는 철학에 근거한 것임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었다.
“휴우.” 혁기는 길게 한숨을 쉬고 나서 손등으로 두 눈두덩을 비비고는 인쇄 명령을 내려 3페이지 분량의 브이 파일을 에이 포 지 석장에 옮겨놓았다.
“여보,준우 방에서 무얼 하고 있어요?” 혁기의 아내 임서희가 준우 방으로 들어서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준우가 가출을 한 것같애.” 혁기가 될 수 있는 한 담담한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니,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학기말 시험 공부한다고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붙어 있었는데.” “어젯밤에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걸 썼는지도 모르지.” 혁기가 브이 파일이인쇄된 에이 포 지들을 아내에게 건네주었다.서희는 그걸 읽더니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고등학교 2학년짜리가 이따위말들을 해도 되는 건가요? 가정이 필요없다니? 아니,지금까지 누구 덕으로 자기가 먹고 자고 공부를 해왔는데,학교가 필요없다? 설사 준우가 학교가 필요없다는 생각은 할 수 있 다고 해도가정까지 필요없다고 하다니.이건 망발이고 배신이에요.” 서희는손에 든 에이 포 지들을 흔들어대며 언성을 높였다.
“사춘기 때는 엉뚱한 생각들을 해볼 수도 있겠지.변증법적으로이야기하면,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온 모든 .정(正)'에대해 .반(反)'의 기치를 든다고 할까.그러다가 나이가 좀 들고 하면 .합(合)'이라는 타협점에 이르게 되는 거지.60년대한창 설치던 히피들도 나이가 들자 양복을 차려입고 사회로 복귀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운동권에 속하여 학생운동에 앞장서던 자들도 요즈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제도권의 중심으로 들어오기도하고.” “엉뚱한 생각은 생각으로 그쳐야지,이렇게 실제로 가출을 시도해도 되는 건가요? 지금이 자기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때인데.” 서희가 이제는 안절부절못하며 방을 왔다갔다 하였다.
“일단 며칠 기다려봅시다.학교에도 연락을 취해보고.” 글 조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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