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핵심은 적대 사상에 대한 투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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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997년 2월 12일. ‘주체사상의 탈북’으로 일컬어진 대사건이 있었다. 황장엽 당시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중국 베이징 주재 한국 대사관에 망명 신청을 한 것이다. 그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기초한 인물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충격은 컸다. 그가 최근 『인간중심 철학원론』(시대정신)을 펴냈다.

황장엽씨는 머리말에 “아마도 나의 마지막 저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는 올해 85세의 고령이다. 이 책은 2001년에 나온 『맑스주의와 인간중심철학』 3부작과 2006년의 『변증법적 전략전술론』을 수정·보완했다. 저자의 측근에 따르면 “청년들에게 내 사상을 정리된 판본으로 제시하고 싶다”는 것이 이번 출간의 의의다.

‘반 김정일 운동’의 입장에서 일관된 저자의 발언은 그간 남한에서 ‘극우 세력’의 대변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고정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자극적 질문과 편의적 인용에 거부감을 느껴왔다고 한다. 남한에서 15권의 책을 냈지만 그의 저서에 대한 토론은 거의 없었다.

◆인간 중심의 세계 민주화론=저자의 화두는 인류 운명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학문으로서의 ‘인간중심 철학’이다. 또 인간이 주체가 되고 중심이 되는 진정한 정치형태가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규정된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혁명’은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인류의 운명을 계급의 운명으로 왜곡한 과오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그는 지금의 민주주의 성과를 심화하기 위해 ▶계급 이기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독재 ▶민족 이기주의에 기초한 파쇼 독재 모두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 심화는 국가 이기주의에서 벗어난 선진 국가들 간의 국제적 민주주의 동맹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사상투쟁으로서의 민주주의론=저자의 민주주의론은 대단히 투쟁적이다. 모든 사상·이념의 포용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적대 사상에 대한 전략적 투쟁으로서의 민주주의론이다. 사회주의 선전선동론을 민주주의 선전선동론으로 대체한 듯하다.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 사상이란 김정일 수령 절대주의 체제다. 그는 북한에 대한 무력투쟁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상투쟁’을 통한 후방 민주화에 중점을 둔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 국제 공조를 통한 ‘외교전’으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본다. 그가 “미국이 이라크 사태와 관련해 퍼부은 막대한 자금을 중국·러시아가 민주주의 국제 동맹의 성원이 되도록 하는데 사용했더라면 그 성과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맥락이기도 하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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