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그들>날씬이 패션 유혹에 가엾은 몸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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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종교처럼 번지는 다이어트 열풍.20세전후.특정한'체격 갖춘 여성만 상대로 제품 생산하는 패션경향에.아줌마 몸매'여성들 수난.최근엔 남자용 코르셋도 잘 팔린다는데.
아름다움의 추구는 본능인가,학습인가.
66 사이즈까지밖에 없다고요?” 여대생처럼 보이는 20대 초반의 약간 살이 찐듯한 손님은 입을 삐죽 내밀며 동행 친구에게“야,가자”며 서둘러 매장을 떠난다.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3층에 개설된.96뉴욕'매장은 언뜻 보기에 여느 매장과 다른게 없다.그러나 여기는 아무나 옷을 사입을수 있는 곳이 아니다.이곳에 진열된 여성 의류의 최대 사이즈는66.진은 29인치까지밖에 나오지 않는다.그 이상의 치수를 가진 여성은 안타깝게도 발길을 돌려야 한다.여성의 허리가 29인치라면 날씬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흉하게 뚱뚱한 것도 아니다.
더 중요한 점은 이 브랜드의 옷들은 타이트한 스타일이어서 치수가 맞더라도 몸매가 늘씬하지 않으 면 소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살찐 여성은 유감스럽게도 우리 제품을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96뉴욕'의 이용협 본부장은 자사 브랜드의 옷이 20세 전후의.특정한'체격조건을 갖춘 여성들을 겨냥한 제품임을 인정했다.“물론 살찐 분들도 방법은 있습니다.우리는 유 니섹스풍30인치 이상의 옷을 함께 내놓고 있으니까요.” 지난 3월에 등장한 .96뉴욕'의 브랜드 전략은.젊고 섹시한 이미지 메이킹'이었다.그러기 위해선 주고객을 늘씬하고 세련된 20대 초반의여성들에 한정시킬 필요가 있었다.이들이 바로 패션리더층이기 때문이다.한마디로.아줌마'들은 입지 못하게 하자는 얘기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일정 치수 이하의 타이트한 옷'.
몸매에 자신이 없는 여성들의 신경을 건드릴 수도 있는 이 전략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다.회사측이 밝히는 매출액 신장률은 매달 10~20%로 이 정도면 고객의 반응이 매 우 좋은편에 속한다.
물론 .96뉴욕'의 전략이 지닌 특수성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ENC.시스템.나이스클럽등 기존 브랜드들이 고치수의 물량을 줄이고 저치수 품목을 중점적으로 내놓기 시작한 것은 벌써 2~3년 전부터다.이용협 본부장은“우리와 같은 컨셉트 를 가진 브랜드가 내년에 3~4개 더 생겨날 것”으로 전망한다.
.스키니(Skinny)'와.타이트(Tight)'는 이미 여성의류 브랜드의 가장 중요한 전략 가운데 하나가 됐다.상체의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쫄티'는 이미 몇해 전부터 유행 품목에올라 있고,외관상으론 타이츠와 별반 다름없어 보이 는 레깅스및스판덱스 바지는 올해의 최대 인기 품목으로 자리를 잡았다.여기에 아예 치수에까지 날씬이들만 상대하겠다는 의도를 직접 드러낸브랜드가 탄생함으로써.아줌마 몸매'여성들의 수난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셈이다.
수요가 가장 많은 여성 캐주얼의 경향이 이렇다 보니 몸매를 조이는 속옷의 판매량도 더불어 급증했다.코르셋과 니퍼,가슴.히프용 패드 뿐만 아니라 살을 빠지게 한다는 수입 속옷까지 나와인기를 끌고 있다.마침내 살빼는 신발도 개발됐다 .최근에는 남자들까지 여기에 가세했다.듀엣 클론처럼 가슴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차림을 한 청년들을 구경하기란 별로 드문 일이 아니게 됐고 남성용 코르셋 판매량도 꾸준히 늘고 있다.
패션계의 이런 조류의 근원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사회의 날씬이병이다..날씬해야 산다'는 것은 요즘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겐 거역할 수 없는 율법이다.신흥종교로까지 일컬어지는 다이어트 열풍은 갖가지 부작용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영동제일병원 이규래(가정의학)박사는“최근 비만 상담을 하러오는 젊은 여성들은 대부분 정상체중이거나 그 이하”라고 말한다.제일기획이 20~25세의 비만이 아닌 여성 1백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선 조사대상자의 61%가 건강을 해치더 라도 마른 몸매를 갖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요즘 유행하는 옷들이 타이트한 아동복 스타일 이어서 살을 뺄 수밖에 없다는 대답도 70%나 됐다.살빼기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패션업계도 한몫 거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런 패션 경향에 대해 부정적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패션평론가 김형암씨의 견해.“옷과 몸이 만나 빚어내는 조형과 곡선미를 중시하는 것은 패션의 세계적 조류다.비정상적인 날씬함에 대한 맹목적 찬미가 이 경향에 일부 스며 있긴 하지만전체적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을 패션의 중심에 올려놓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 아름다움의 추구가 본능적인것인가 아니면 학습에 의한 것인가는 미국에서도 논란이 계속되고있는 문제다.어느 쪽이든간에 날씬함에 대한 여성들의 집착이 사그라들지 않는 한.말라깽이 옷'과.뚱뚱한 몸매'의 신경전은 당분간 지속될 것같다 .

<허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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