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詩, 변화 조짐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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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예지 '시인세계' 여름호는 북한의 최근 시와 시 비평을 소개하는 기획특집 '오늘의 조선시와 조선시인들'을 마련했다.

특집에 소개된 '조선시'는 동기춘.렴형미.리영삼.리진협.박해출.신흥국.최영화.홍철진 등 30대 신진부터 70대 원로급까지 8명의 시인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쓴 14편이다. 이어 조총련계 시인 김학렬과 북한의 문학평론가 류만, 남한의 소장 문학평론가 홍용희.이상숙씨의 평론 한편씩을 실었다.

동기춘이 북한 최고 권위의 월간 문예지인 '조선문학' 2003년 5월호에 발표한 '고와야 한다'는 봄의 김매기부터 겨울의 땔감하기까지 농사일 1년을 따라갔다.

"밭김을 매던 로동의 첫날/내가 마구 찍은 엉성한 이랑을 돌아보며/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네/-김 맨 뒤가 고와야 한다".

아버지가 들려준 농사일의 '노하우'에는 인생철학까지 담겨 있다.

"모든 완성은 아름다와야 한다/촌늙은이가 로동으로 가르쳐 준 예술철학".

여성시인 렴형미가 '조선문학' 2002년 3월호에 발표한 '녀인의 노래'에서는 차분하고 침착한 여인의 성정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행복의 옷은 녀인이 뜬다네/기쁨과 때로 아픔이 엉킨 생활의 실토리/녀인의 작은 두 손에 풀려 나가네".

홍용희씨는 "북한 문학이 수령과 주체사상 찬양 일변도에서 벗어나 가족.연애 등의 개인정서, 여성의 사회 진출 등 생활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물론 문학이 당의 이념적 지향과 시대정신을 인민에게 교육하는 공식적인 지배 담론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풍토는 여전하다. 홍씨는 그러나 "민족적 정통성과 미의식의 계승을 강조하는 요즘의 시편들이 민족 통합의 시대에 대응하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평론 부문에서는 좀더 활발한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홍씨는 특집에 게재한 자신의 평론에서 평안북도 작가동맹 소속 시인 김정철의 지난해 평론을 소개했다. 여기서 김정철은 "우리는 고전시가의 류창한 운률과 함께 간결성과 섬세성, 온갖 형상적 묘기들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은 "너나 없이 역설이 많고 이런 저런 사료들이 인입되어 읽을 맛도 없고 외우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이어 김정철은 "아무리 문장을 잘 다루는 재사라도 사료인입에 3~4련, 앞뒤로 감정 조직을 하려면 또 몇련, 그러고 나면 시인은 아직 제 할 소리를 못하고 있는데 시는 10련을 넘어선다"고 비판했다.

신준봉 기자

녀인의 노래 - 렴형미 -

아름다운 행복의 옷은 녀인이 뜬다네
기쁨과 때로 아픔이 엉킨 생활의 실토리
녀인의 작은 두 손에 풀려 나가네
인생은 다시 뜰 수 없는 뜨개질과 같아
만약 한 코를 놓친다면
불행의 흠집은 날로 커지리
(중략)
아, 녀인이여 사랑의 시작도
사랑의 마무리도 그대가 맺는 법
정다운 이들에게 입혀 줄
아름다운 행복의 옷은
굳세인 녀인만이 지을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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