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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가 보여준 지성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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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공직에 마음을 둔 사람이 출마를 앞두고 쓴 책이란 게 대개 그렇지만 저서라기보다는 홍보물에 가깝다. 신변잡기나 단편적인 생각을 모아 책의 형태로 엮어 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나마 본인이 직접 썼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돈만 내면 입맛에 맞게 알아서 척척 만들어 주는 대행사도 있다고 들었다. 유권자들에게 이름을 알릴 목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기획물이 보통 정치인의 저서인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은 특별하다. 그는 직접 책을 쓸 줄 안다. 그것도 아주 잘 쓴다. 뉴욕 타임스의 서평 전문기자인 미치코 가쿠타니는 오바마를 가리켜 “실제로 글을 쓸 줄 아는, 그것도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감동과 진실을 담아 쓸 수 있는 희귀한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그가 많은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시카고 대학 법대 교수로 있던 1995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썼고, 2006년 연방 상원의원 신분으로 『담대한 희망』을 썼다. 전자가 자서전적 성격을 띤다면 후자는 일종의 정치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책을 쓰고, 1년 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두 번째 책을 출간한 지 3개월 만에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것을 보면 그 역시 공직을 염두에 두고 책을 쓴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보통 정치인들의 그렇고 그런 책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의 글은 대개 자신의 경험담으로 시작한다. 경험을 실마리 삼아 차근차근 사유를 확장해 나간다. 그의 사유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다. 문제의 복잡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다음 한 발 한 발 핵심에 접근해 나가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격정이나 흥분, 떨림 같은 단어는 그의 글과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침착·배려·깊이·균형·솔직성 등이 어울리는 단어들이다.

한마디로 재미보다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그래서 그의 책은 후딱 쉽게 읽히지 않는다. 사유의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명상록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든다. 책을 쓸 줄 알고, 글을 잘 쓴다고 해서 미국인들이 오바마를 선택한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책에서 드러난 그의 지적 사유 체계와 태도가 선거운동을 통해 미국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성은 극단을 배격한다. 표면보다 이면의 진실을 추구하고,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생명으로 여긴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자기 입장만 내세우지 않는다. 상대방의 얘기에 귀 기울이며 그것이 옳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합리적 배려는 지성의 증거다.

나는 성공한 정치인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고 싶은 타입이고, 또 하나는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타입이다. 가치와 신념은 물론이고, 성격과 기질에서 상극일 것 같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해 오바마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직접 만나 봤더니 기민하고 절도 있고 솔직한 태도가 마음에 들더란 것이다. 적어도 화제가 스포츠와 아이들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부시는 사귀면 좋을 사람이라는 게 오바마의 평가다.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며 부담 없이 얘기를 나누기엔 제격이란 뜻일 것이다. 2000년과 2004년 연거푸 미국인들은 그런 부시를 선택했다.

 내게 오바마는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정치인이다. 개인적 삶의 문제에서, 국가와 세계의 온갖 모순과 갈등에 대해 함께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정치인이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견해와 시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것 같은 정치인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오바마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지성은 때로 이도 저도 아닌 중도주의로 흐르고, 우유부단함 때문에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 미국인은 오바마의 지성을 택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물론 속단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기에 좋은 정치인보다는 적어도 나은 결과를 낳을 것은 확실해 보인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