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글밭산책] 분노는 짓밟히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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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아버지에게 학대받는 열네살 소녀가 집을 나와 어머니 혹은 그와 비견되는 모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엄마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두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을 테니, 안전하고 흔하고 오래된 그야말로 유명한 소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그것을 상투적이지 않게 하는 몇 가지 요소가 등장하는데, 바로 흑인 성모 마리아상과 벌 그리고 숨막히는 더위만큼 지독했던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과 민권운동이다.

때는 흑인을 재워주느니 모텔의 문을 닫는 편을 택한 사람들이 심심치 않던, 저자의 말을 빌리면 “만약 주님이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 용서하든지 죽든지’하고 말했다면 모두 앞 다투어 관을 주문했을 것이 틀림없는” 1964년이다.

“그는 성 어거스틴에서 벌어진 인종차별의 폐지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행렬을 방해한 백인 폭도들과 백인 자경단, 소방용 호스, 그리고 최루가스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세 명의 민권 운동가가 죽었다. 두 개의 폭탄이 터졌다. 그리고 세 명의 흑인학생이 도끼를 든 백인들에게 추적을 당했다.”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백인 남자에게 얻어터지고 감옥에 갇히며 다시 경찰관 앞에서 백인 남자들에게 사과하지 않는다고 또 구타당해 뇌진탕까지 걸린 흑인 유모 로잘린을 구출해 어린 릴리는 집을 나선다.

네살 때 죽은 어머니의 자취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로의 비밀지도는 검은 성모라는 단 하나의 모티브이다. 그리고 검은 성모가 그녀들을 인도한 곳은 ‘마리아의 딸들’이라는 모임이 있는 벌치기 오거스틴의 집이다. 그 흑인 여성들의 공동체 속에서 소녀 릴리는 성장해 나가지만 백인이라는 이유로 역차별받을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그 핵심이 그 중 가장 인텔리 여성인 준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준은 내 피부가 하얗다는 이유로 나를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 - 백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차별하다니. 뜨거운 물결이 전신에 일렁였다. 제럴드 목사님은 그것을 ‘정당한 분개’ 라고 불렀다. 성전에서 테이블을 뒤집어 엎고 도둑놈 같은 환전상들을 내쫓았을 때 예수님은 정당하게 분개했었다. 나도 당장 베란다로 올라가 테이블을 뒤집어 엎고 빽 소리치고 싶었다. 준 보트라이트, 당신은 날 잘 알지도 못하잖아요!”

알지도 못하고 미워하는 일이,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일이, 알지도 못하고 죽이는 일이 뭐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라서 이 대사는 미묘한 울림을 준다. 열네살 소녀가 잔디 밭에 쭈그리고 앉아 쉬를 하려는 장면이어서 더 그렇다. 화가 났지만 릴리는 소변을 본다. 그리고 그 냄새를 맡으며 생각한다. 내 소변과 준의 소변은 아무 차이도 없잖아!

릴리는 그곳에서 흑인 여성들이 검은 성모상을 놓고 드리는 일종의 모임에 참석한다. 그 검은 성모는 우리가 흔히 보는 미모의 할리우드 여배우 같은 성모상은 아니다. 그 성모는 “툭 튀어나온 두툼한 팔뚝과 터질 듯이 쥐어진 주먹”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쇠사슬의 성모 마리아라고 불렀다 그녀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쇠사슬을 끊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지지난해인가 검은 성모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서북쪽 카나리아 제도의 작은 섬을 여행할 때였다. 검은 성모는 폴란드에도 있는데 그 일화는 비슷했다. 검은 성모를 발견하고 놀란 백인 수녀들이 그것을 버리거나 치워놓아도 그것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거부당해도, 그래도 다시 제자리에 와 있는 검은 성모상….

소설은 그래서 이렇게 끝난다. “그들은 그렇게 나를 위해 자리를 지켜주었다. 나의 어머니들, 세상의 누구도 나보다 많은 어머니를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제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여성성이고 모성인지….

내가 이 자리에 그대로 있고 싶지 않은 수만 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나는 그럴 거라고 생각해 본다. 이 소설의 힘이다.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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