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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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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세기 초반의 가장 비극적인 예술작품은 한 여인을 모티브로 삼았다. 알마 말러(1879~1964)다. 첫 남편 구스타프 말러는 후기낭만파의 거장이다. 그의 6번 교향곡은 ‘비극적’이란 제목과 달리 부드럽고 장엄하다. 천상의 소리라는 ‘알마의 테마’가 귀를 사로잡는다. 19살 아래의 아리따운 아내를 위한 곡이다. 그는 관능적이고 지적인 알마에게 무섭게 집착했다. 그녀를 독점하려고 집에 감금하는 광기를 부렸다. 말러의 교향곡은 두 사람의 비극적 결말을 예고한다.

유럽 표현주의 대가인 오스카어 코코슈카. 그가 그린 ‘바람의 신부’는 치명적 불륜을 담았다. 그 상대가 6살 연상의 미망인 알마.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둘은 감당하기 힘든 사랑을 나눈다. 알마는 편안한 잠을 이루지만 남자의 퀭한 눈은 불안한 듯 허공을 헤맨다. 코코슈카는 400통의 연서를 보낼 만큼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런 그를 버리고 알마는 안정된 삶을 찾아 떠난다. 코코슈카는 66년 동안이나 정신분열증에 시달렸다. 알마는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요즘 영화나 TV드라마에는 팜므 파탈이 넘쳐난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아름다움으로 남자 주인공의 운명을 나락에 빠뜨리는 악녀 역할이다. 지난해 신정아 사건에서 요즘 여의도 정가를 긴장시키는 꽃뱀 괴담까지. 연일 팜므 파탈이 입방아에 오른다. 최신판 팜므 파탈이라면, 미국의 애너 니콜 스미스에 견줄 만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스트립바를 전전하던 그녀는 성인잡지 모델이 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63살이나 많은 89세의 석유재벌 하워드 마셜과도 결혼했다. 남편이 결혼 1년 만에 숨지자 남겨진 유산은 4억7000만 달러. 그녀는 과연 행복했을까.

여성의 눈으로 보면 팜므 파탈이 달리 보인다. 알마는 원래 예술적 재능을 타고났다. 말러와 코코슈카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사랑했을 뿐이다. 세 번째 남편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최고의 건축가. 마지막 남편인 프란츠 베르펠도 세계적인 작가였다. 알마는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고 천재적인 예술가”라고 기억한다. 애너 니콜 스미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전처 소생의 아들과 끝없는 상속분쟁이 벌어지면서 약물에 중독됐다. 19세의 아들마저 숨지자 지난해 호텔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진실이 모두 드러날 때까지 팜므 파탈로 함부로 비난할 일은 아니다. 현대판 주홍글씨가 따로 없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