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헤리티지 대항마 ‘미 진보센터’ 가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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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미국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1980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과 손잡고 정권 인수 준비를 했다. 헤리티지는 레이건 팀에 인력과 정책 비전을 제공했다. 헤리티지의 1100페이지짜리 정책제안서 ‘리더십을 위한 칙령(Mandate for Leadership)’은 레이건 정부의 청사진이 됐다. 헤리티지는 84년 대선에서 승리한 레이건의 집권 2기 때도 같은 역할을 했다. 레이건 시대 8년 동안 헤리티지는 급성장했다. 레이건은 83년 헤리티지 창설 1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헤리티지의 성장은 보수주의 이념의 확산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가 집권할 경우 헤리티지처럼 각광 받을 워싱턴의 싱크탱크가 있다. ‘미국 진보센터(the Center for American Progress·CAP)’다. 오바마의 정권 인수팀을 CAP 소장인 존 포데스타가 이끌고 있고, CAP의 주요 인사들이 오바마 캠프와 정권 인수팀에서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CAP는 공화당 보수파의 시사지 내셔널 리뷰가 “가장 공격적이고, 열성적인 반대파”라고 말할 정도로 진보적이다. CAP는 2003년 7월 헤리티지 재단과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요새로 알려진 기업연구소(the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AEI)의 대항마가 되겠다며 “보수파의 정책을 신속히 비판하고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목표 아래 발족했다. ‘헤지펀드의 황제’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가 창설 때부터 재정 지원을 해 왔다. CAP는 요즘 공화당 존 매케인 대통령 후보의 조세·건강보험 정책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포데스타는 CAP 창설 멤버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남편 빌 클린턴이 집권했을 때(93년 1월∼2001년 1월)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다. 민주당 경선 땐 힐러리를 돕다가 오바마가 경선에서 승리하자 그의 정권 인수 작업을 책임지고 있다. 포데스타는 4개 그룹(인사·행정·입법·경제)과 12개 소그룹으로 구성된 정권 인수팀을 이끌고 있다.

CAP의 여러 부소장 중 한 명인 흑인 여성 카산드라 버츠는 인수팀의 인사 부문을 맡고 있다. 하버드 대학 법과대학원에서 오바마와 절친한 사이였던 그는 경선 땐 오바마의 국내정책을 총괄했다. 지금은 백악관과 행정부의 고위직을 채울 후보감을 고르는 작업을 지휘하면서 클린턴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리언 패네타의 의견을 참고하고 있다고 민주당의 한 고위 관계자가 29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오바마가 집권하면 상원 인준을 받아야 할 고위직만 1177개가 된다”며 “버츠의 성향은 상당히 진보적이기 때문에 비슷한 색깔의 인사들이 약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클린턴 시절 국방부 차관을 지내면서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허용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던 CAP의 안보·국제정책 담당 부소장 루디 딜리언 등과 같은 진보파가 고위직에 발탁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CAP의 선임연구원 중 톰 대슐 전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에드워즈 케네디 상원의원 보좌관 출신인 흑인 여성 멜로디 반즈(오바마 캠프 국내정책 담당), 백악관 경제보좌관을 지낸 진 스털링(경제 담당), 데니스 맥도너(안보 담당), 로런스 코브(이라크 정책 담당) 등 CAP 소속 인사들도 요직에 기용될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의 정권 인수팀은 별도 사무실을 두지 않은 채 활동하고 있다. 인수팀의 핵심들은 CAP에 모여 작업하기 때문에 “CAP는 오바마의 보이지 않는 헤드쿼터”라는 얘기가 나온다.

CAP의 1년 예산은 2000만 달러 정도다. 헤리티지 재단은 1년에 약 3700만 달러를 쓴다. 오바마 캠프 관계자는 “우리가 집권하면 CAP를 지원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많을 것이므로 그 규모가 헤리티지를 능가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민주당의 전통적인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도 성장할 것”이라며 “국무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수전 라이스(전 국무부 아프리카 담당 차관보) 등 브루킹스 소속 인사들도 중요한 직책을 차지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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