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週를열며>無常을 넘어 常生에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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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1월은 신앙인들에게 .위령성월(慰靈聖月)'이라고 해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분들을 기억하고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는 달이다.우리가 진지하게 죽음을 의식하고 성찰할 때 우리는 인간의 삶이 .지금 여기에서'만으로 허무하게 끝나 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생(生)이 펼쳐지고 지속되리라는 희망의 문과 그 가능성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죽음을 긍정하고 받아들임은 이 유일회적(唯一回的)인 이승살이가 말할 수 없이 소중하며 세상과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고귀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생의 긍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의 모든 삶은 인간의 모든 기대와 희망을 능가하는 .전적인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다림이며 정화(淨化)의 기간이 된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는 허다한 사회문제의 근저에는 .지금 여기'만이 전부라는 현상론적 가치관이 깊게 자리잡고 우리의 사고와심성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이는 물질만이 전부라는 유물론(唯物論),감각적인 쾌락주의,편의주의,여러 형 태의 소비문화안에서 잘 드러난다.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는 11월이 되면 .무상(無常)을 넘어서'라는 수상집을 남기신 고(故) 김홍섭(1915~65) 판사님의 생애가 자주 떠오른다.내가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유년시절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중 하나는 그 분이 교회일로 고향에 내려오실 적마다 우리집 사랑방에 머무르시던 일이었다.그 분은 참으로 선하고 인자하신 수수한 시골 아저씨와 같은 분이었다. 그 분에 관한 일화중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하루는 타고 있던 버스가 검문을 받고 있었는데 경관이 허름한 외모의 이분께 이르러 “뭐하는 사람이야?” 하고 물었다.“판사입니다.”“판사는 무슨 판사야? 신분증 내놓아”하고 경관이 소리쳤다.그는 신분증을 꺼내 공손히 내주면서 “판사를 판사라고 그러지 뭐라고 하겠습니까?”하고 조용히 대답했다.그의 신분증에서 대법원판사임을 알아본 경관은 깜짝 놀라 깍듯이 거수경례하면서 용서를청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그 분의 겸허함,온유함,수도자와 같은 청빈(淸貧)의 삶을 우러러 생각해본다.또법관으로서 인간이 인간의 죄를 판결해야 한다는 고뇌속에서 어쩔수 없이 유죄 판결을 내린 죄수들을 인자한 아버지처럼 돌보고 또 사형수들을 영원한 삶으로 이끄셨기에 지금도 법조계의 사표(師表)로 우뚝 서 고결한 덕행의 향기를 발하고 계시다.
이 분이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며 존경받음은 무상을 넘어상생(常生)에로 가는 길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준비했기 때문이다.죽음의 의미를 깊게 반추하고 사는 구도자(求道者)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돼 있는 각종 병폐는 이 사회를 지탱하고 뒷받침하는 기초와 원칙들이 무너지고 부재(不在)함에 있지 않을까.원칙을 지키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을 질서지어 주어야 할 정의의 회복에서 가능할 것이다.그런 면에서 공정한 수사권을 행사하고 법적 정의를 실행해야 할 검찰과 사법부의책임이 크다고 하겠다.그렇지만 일반 국민의 눈에 비친 검찰과 사법부 법조인의 모습은 어떠한가.
정의는 인간 존재와 인간의 자기 실현과 공동체 생활에 가장 기본적이고 필요한 것들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기에 정의에서 오는행동은 객관적이고 외적인 선의에만 국한되는 것이다.정의를 보완하고 완성시키는 것은 사랑과 자비며,정의가 요구 하는 것은 사랑의 최소한의 요구다.이런 면에서 이 사회의 정의를 수호하고 확립하는 기초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질서를 가늠하는 실증법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가치관과 세계관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이런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사람은 냉혹하고 준엄하고 권위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우러나오는 온유함,부드러움을지닐 것이다.
具要備 〈신부.프라도사제회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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