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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없이 확대된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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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100여년 동안 유럽에서 5월 1일은 노동절로 인식됐다. 붉은 깃발을 앞세운 시위대는 매년 '임금인상과 근무시간 단축'을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는 대규모 행사를 하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유럽연합(EU)이 종전의 15개에서 25개 회원국을 거느린 수퍼 EU로 재출범하는 대규모 축하행사에 가려 노동절 시위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새로 EU에 가입한 몰타와 키프로스는 옛 소련권 국가였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은 옛 소련의 일원이었으며, 체코와 헝가리.폴란드.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 등 동유럽 5개국 역시 소(蘇)연방 제국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단순한 '유럽 확장'이 아니다. 이는 그간 발트해.발칸지역 국가들과 유럽을 가로막았던 철의 장막을 말끔히 제거하는 역사적 행사였다.

철의 장막이 들어선 지 60년 만에 유럽은 또다시 하나가 됐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처음으로 유럽이 하나로 통일됐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동진정책은 수없이 많았다. 18세기 프러시아와 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은 폴란드를 분할 지배했으며, 나폴레옹도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까지 진격했다. 히틀러의 군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에 이어 러시아까지 지배하려 하지 않았는가. 이런 점에서 2004년 5월 1일은 유럽역사의 대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유럽 사람들은 자국의 EU 가입에 흥분했다. 서유럽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까. 그렇지 않다. 기존 EU 회원국 국민이 갖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다음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우선 교역 장벽이 없고 자본과 노동력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단일시장이 형성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서유럽으로 몰려들 동유럽 인력이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다. 둘째는 동유럽의 우수하고 저렴한 노동력과 EU 시장을 노린 해외 자본이 EU의 새 회원국에 투입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동유럽 지역의 임금은 독일과 네덜란드의 10분의 1 수준이다. 마지막으로 동유럽의 값싼 제품들이 유입돼 서유럽에서 생산된 고가의 제품들을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런 우려는 오해에 불과하다. 값싼 제품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서유럽 사람들은 냉전종식 이후 동유럽과 서유럽 간의 관세장벽이 사실상 무너져 이미 지난 십수년간 자신들이 동유럽의 제품들을 이용해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어떤가. 그들 역시 오래 전부터 서유럽에 진출해 있다. 독일 내 동유럽 출신 노동자 수만 약 50만명에 달한다. 그리고 이들은 고맙게도 청소와 공사판의 일용직 등 독일인들이 꺼리는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자리 역시 모두 동유럽 쪽으로 옮겨갈까. 독일인의 73%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객관적인 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동유럽 지역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대부분 EU 확장 이전에 이뤄졌다. 예컨대 2002년 82억달러에 달했던 체코에 대한 서방사회의 투자규모는 2003년 23억달러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슬로바키아의 경우도 40억달러에서 5억달러로 하락했다.

결과적으로 EU 확장은 한때 분리됐던 대륙을 통일시킴과 동시에 역내 경제적 이득을 가져올 것이다.

이제 서유럽과 동유럽은 무력이 아닌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폴란드와 체코 등 새 EU 회원국들에 법규를 강화하고 세율을 인상할 것을 강요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새 회원국들의 정치인들은 '늙은 유럽'의 시장 자율화를 요구하며 맞설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들이 치를 전쟁이 더 이상 탱크와 군화가 아닌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전쟁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요제프 요페 독일 디차이트 발행인
정리=박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