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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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혜순(1955~) '비' 전문

하늘에서 투명한 개미들이 쏟아진다 (비)
머리에 개미의 발톱이 박힌다 (비)
투명한 개미들이 투명한 다리로 내 몸에 구멍을 뚫는다 (비)
마구 뚫는다 (비)
그를 떠밀면 떠밀수록 그는 나를 둘러싸고 오히려 나를 결박한다 (비)
내 심장의 화면에 투명한 글자들이 새겨진다 (비)
나는 해독하지 못한다 (비)
글자들이 이어져 어떤 파장을 그린다 (비)
새겨진다 (비)
하느님,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비?)
못 알아듣겠어요 (비)
이 전깃줄은 물이잖아요? (비)



비는 내리는 게 아니라 개미의 발톱처럼 와서 박힌다. 비는 어딘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몸으로 들어와 무슨 신탁처럼 새겨진다. 그러나 이 누수(漏水)와 누전(漏電)이 그려내는 글자들을 우리는 읽어낼 수가 없다. 다만 구멍 뚫린 몸이 그 파장에 따라 요동치고 있을 뿐. 그 사이에도 비는 괄호 속에서 계속 내리고 있다.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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