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소통 형식도 시대에 맞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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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톨스토이는 인생을 삼분해 살아야 한다는 지혜를 남겼다. 하루 중 8시간은 자고 먹으며 놀아라, 8시간은 일을 해라, 그리고 8시간은 공부해라. 실천하기는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사람은 가능하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이 그렇다. 나는 연구와 봉사에 사용하는 공간을 네 개나 가지고 있다. 최근 이 장소에 라디오가 있나 찾아보았다. 방 넷 중 오디오는 하나뿐인데 라디오 주파수를 찾는 것이 영 어색했다. 대학 졸업 후 라디오를 들은 기억이 없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라디오로 연설을 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 때문이었다. 결국 대통령 연설은 못 들었고,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메시지는 확인했다.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에 대한 논란은 매체 선정의 적합성에서 시작된다.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노변정담(fireside chat)을 벤치마킹했다.

여기서 배워야 하는 것은 매체가 아니라 루스벨트의 정신과 전략이다. 라디오는 당시 국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매체였기에 선택했을 뿐이다. 루스벨트는 국민에게 조금 더 다가가면서 자유와 조국, 그리고 정책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라디오를 이용했다.

대한민국의 21세기는 커뮤니케이션의 혁명기다. 웹 2.0 정신을 구현할 것이 요구되는 시대다. 그 정신은 참여와 공유, 그리고 개방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보다 충실해져야 정부가 원하는 것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도 가능해진다.

청와대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에 대한 댓글이 90여 개에 불과했다. 같은 시간 라디오 연설 이후 진정세를 보이던 코스피지수가 사상 최대의 낙폭을 보이고, 환율이 폭등해 금융 공황 상태라는 한 포털 뉴스에 걸린 댓글은 629개라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매체 선정 과정을 보면서 대통령 참모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거듭 하게 된다. 시대변화에 걸맞게 ‘대통령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소통 형식에 대한 고민을 얼마나 해봤는지 궁금하다. 대통령이 아날로그일수록 참모는 디지로그여야 한다.

매체의 선택에서 시작한 논란은 연설의 내용으로 증폭됐다. 라디오는 사람의 오감 중 오직 귀만을 사용해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전통적인 매체다. 그러하기에 라디오에서 성공하려면 귀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서 성우의 경우 목소리는 물론 발성 자체가 보통사람과는 많이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이 라디오에 나오면 귀를 막으라고 해도 기를 쓰고 들을 것이다. 국민과 대통령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안타깝지만 현재 대통령이 처한 현실은 국민이 스스로 귀를 기울이는 환경이 아니다. 따라서 대통령이 국민의 마음을 얻으면서 라디오 스타가 되려면 내용 면에서 국민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용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청와대는 라디오 연설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콘텐트로 국민의 귀를 사로잡으려 노력해야 한다. 이슈를 선점하고 어젠다를 창출해야 한다. 8분 30초라면 시간은 충분하다. 국민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혹시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내용을 재탕해선 안 된다.

대통령이 말한 신뢰·배려·희망의 메시지는 좋은 말이지만 재탕이었다. 진정성이 흐려졌다. 이슈는 대통령이 선점해야 하고 정부는 이를 구체화시켜야 한다. 대통령이 지닌 정신과 정책을 가슴과 숨소리에 담아 전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귀가 솔깃해지고 때로는 눈이 번쩍 뜨일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놓고 세상을 떠난 랜디 포시 카네기멜런대학 교수가 떠오른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겠다며 강의를 준비했던 그는 61개 이상의 금언(aphorism)을 우리 가슴에 심어놓고 갔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의 가슴에 무엇을 심어줄까. 국민은 대통령의 말보다 정부의 정책으로 그를 평가할 것이다.

임동욱 충주대 교수·행정학